• 진지선생 [교육교육열매:초인계]

[배움여행]랜선수학연주회 1강:코로나 사태...무엇을 떠올렸는가-새로운 지성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과 경외심 , Home과 Disaster 그리고 타노스에 대하여

2020.7.29. 제1회 랜선수학연주회

코로나 사태... 무엇을 떠올렸는가?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었다. 지금도 휩쓸고 있고, 당분간은 계속 휩쓸릴 것으로 보인다.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국민의 숨통을 거의 숨이 멎기 직전까지 조여 왔던 ‘미세먼지라는 위협’을 일순간 사라지게 만들고 그 자리를 한방에 차지해 버리고 나서 이제는 그 위용이 지금껏 본 적이 없어 가늠하지 못할 수준까지 거대해져 버렸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예외 없이 모두에게 실체적 위협을 가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개인의 지적 수준이나 상상력의 크기, 혹은 관심사라던가, 자신의 욕망 그리고 정치적 목적에 따라 코로나시대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해 내는데 정말 다양한 종류의 반응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

그리하여 코로나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현 상황에 대한 해석과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 등에 대하여 무엇을 떠올리는가가 한 사람의 많은 것을 설명해 주는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이번 코로나 사태 또한 교육과 관련된 사회현상들에만 관심이 갔다.

1. 먼저 마스크문제


이건 예전에 한번 블로그에 글(https://blog.naver.com/badteachers/222037155960 )을 썼었는데... 간단히 요약하자면 코로나 위협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원격수업’을 요구하고, 확진자수가 한 자리대로 떨어져 어느 정도 안정화 된 상황에서도 무조건 마스크를 쓰고 수업 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의 ‘교육’에 대한 인식 수준이 문제라는 생각이었다.



원격수업이 그나마 가장 적합한 고3들은 차질 없는 수능일정소화를 위해 가능하면 등교수업을 진행하고, 원격수업이 풍성하게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치명적일 수 있는 초등학생, 심지어 유치원 학생들에게는 가장 먼저 ‘원격수업’을 권하는 교육에 대한 사회의 인식수준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서열화와 경쟁이 문제라고 누구나 말하지만, 그것을 빼면 교육에 대해 아무것도 생각해내지 못하는 교육에 대한 사회의 인식수준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또 무엇을 하고 있고, 할 수 있느냐라는 내용과 방법적 측면보다는 ‘출석’과 ‘점검’이 가장 중요하다는 듯 ‘원격수업의 질’에 관한 논의가 ‘실시간이냐 아니냐’의 패러다임으로 슬금슬금 한쪽으로 쏠리고 있는 인식의 수준. 그래서 교사들에게도 똑같이 출석체크와 감시를 하려고 하면서, 부끄러운지 모르고 ‘교사들이 놀까봐 점검을 한다.’라는 속내를 여과없이 드러내는 교육에 대한 사회의 인식수준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학생의 자기주도성, 자율성은 보장되고 강조하면서 길러주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주체인 교사들은 감시하고, 지침을 내려 시키는 것만 하게 하려고 하는 교육에 대한 사회의 인식수준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런 인식의 수준으로 앞에서는 교육의 변화, 혁신을 피상적으로 말할 뿐이고, 뒤에서는 교육에 대한 실제 인식과 자기 욕망으로 스스로가 교육혁신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사회의 모습이 새삼 안타까웠다.

2.하향평준화문제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꽤 많은 세계의 다른 사회에서도 ‘교사’는 조롱이나 희화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존경’의 대상은 분명 아닌 듯하다. ‘교사에 대한 존경’은 교육의 성공을 위해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사항인 점을 생각해 보면 최근 세계적으로 비슷하게 벌어진다는 ‘교실붕괴’, ‘학교붕괴’, ‘교육위기’는 학교가 새롭게 변화하는 사회에 대응하여 성장하지 못한 채로 100년 전 근대학교의 모습에 머물렀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교사’에게 ‘존경의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결과일 수도 있다.


예전에 어떤 방송에서 ‘경제학자’였나 아니면 ‘경제기자’였었나 어쨌든 경제 쪽 전문가가 말하는 것을 분명 들었는데(도저히 다시 그 방송을 찾지 못해서 정확한 출처를 밝히지 못함이 참 아쉽다), 그 사람은 교사에 대해 ‘존경을 표하는 것’이 사라진 현상을 경제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예전에는 스승의 날에 선물을 드리면서 감사의 마음을 표하거나 성공한 이후 교사를 찾아가 자신의 성공이 교사덕분이었음을 공언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스승을 찾아가지는 않더라도 마음속에 존경하는 은사님 한명쯤은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이었고 말이다. 그런데 존경하는 스승을 찾는 행위의 밑바탕에 자리 잡은 욕망은 사실 존경이 아니라는 것이 경제적 관점으로 하는 분석의 출발이었다. 교사의 존재는 생활수준이나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 자신이 중산충인지 하류층인지 확인할 수 있는 ‘바로미터’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를 찾고 그 앞에서 자신의 연봉과 사회적 성공이 교사의 그것을 뛰어넘는다는 걸 확인하면서 우월감을 느끼려고 하는 것이 ‘은사 찾기’의 숨겨진 본질이라는 설명이다. 이러한 욕망을 바탕으로 교사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은 과장되어 갔다고도 했다. 자신의 스승이 대단한 사람일수록 그걸 뛰어넘은 자신의 존재가 위대해 지니까 말이다.

꽤나 그럴싸한 설명이었다. 그러면 왜 지금은 교사가 혐오의 대상이 되었느냐? 이것도 경제적 관점으로 설명을 해 주었다. 원인은 바로 IMF경제위기였다는 것이다. 사실 교사의 연봉이나 처우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데 IMF 경제위기로 인해 전체적으로 사회의 경제적 여건이 쭉 내려가 버렸다. 사회적 지위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기에 가만히 있던 교사들의 경제적 수준이 하류층과 중산층의 경계에서 중산층의 꽤 위쪽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제는 웬만해서는 교사를 찾아서 자신의 성공이 은사를 뛰어넘었다는 우월감을 느끼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사회적 구조의 문제이기에 노력을 하더라도 교사를 뛰어넘기 쉽지 않다고 판단을 마치자 사람들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 자존감을 높이려고 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란 다름 아닌 교사를 혐오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교사의 존재를 망가뜨릴수록 실패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기에 죄책감도 들지 않고, 성공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그 가치를 높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학창시절에 저 선생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달라졌을텐데.’, ‘학창시절에 저런 선생을 만나는 불행이 있었지만 내 스스로 이겨내고 이정도 이뤄냈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인간 존재는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복잡다단한 것이기 때문에 어찌 경제적 요인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으랴. 하나의 가설로서 그럴싸한 것이지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꽤나 매력적인 해석으로 느껴진다. 나는 이 분석을 근거로 교사를 끌어내려서 자신들의 상대적 지위를 높이려고 하는 사회의 ‘하향평준화’를 참 천박하다고 생각했다. 교사를 바로미터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불순하고, 기준이 너무 높다고 해서 기준을 무너뜨려버리려는 것도 참 불순하다고 여겨졌다.

한편, 광화문 집회와 교회로 인해 상황이 심각해져서 이제는 TV에 나오는 사람들도 대부분 마스크를 쓰고 있는 요즘과는 달리 약 1달쯤 전까지는 TV에 나오는 정치인, 연예인, 언론인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았었다. ‘방역지침을 준수했다.’는 자막 하나만 있으면 닫힌 공간에서는 마스크를 벗고 활동했던 것이다. 나는 이런 현상을 보고 누구보다 철저하게 방역지침을 준수하는 학교라는 공간에서도 마스크를 벗어야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면서 마스크를 쓰고도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비난했다. 정치인, 연예인, 언론인들도 쓰지 않으니 학교에서도 좀 쓰지 않게 해달라고 한 것이다.


그러다가 나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선생님들을 보았다. SNS를 통해서 ‘TV에서도 마스크를 쓰는 등 방역지침을 준수’해 달라는 요구를 한다. ‘너네도 지키지 않으니 우리도 안 지키겠다.’라는 나와는 반대로 ‘우리는 계속 잘 지킬테니까 너네도 좀 지키는 것이 어때.’라는 말이었다. 나의 태도가 유아의 태도였다면 이 선생님들은 어른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어른의 태도를 본 순간 내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아... 하향평준화


사회의 교사를 향한 하향평준화 요구에 대하여 천박하다고 생각했으면서, 나 역시 ‘하향평준화’에 묶여있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옳은 일이라던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어른의 태도로 좀 더 높은 목표를 지향해 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하향평준화를 사회에 요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반성을 하게 된다.


3. 제 1회 랜선수학연주회


내 지성의 수준에서는 ‘마스크 문제’라던지 ‘하향평준화 문제’정도만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꽤나 중요한 문제라고도 여겼다. 하지만 제 1회 랜선수학연주회에서 모리타 마사오라는 지성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내가 한번도 다가가보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살짝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코로나는 자연재해(Natural disaster)가 아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박죽에게는 그냥 평화롭게 함께 하는 것이었지만 인간의 활동에 의해 인간에게로 넘어와서 문제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 disaster는 별이 떨어지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는 박쥐와 인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시작되었기 때문에 자연재해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동물 안에 살던 바이러스가 동물이 인간의 활동으로 소멸하자 “난민화”하여 밖으로 튀어나와 인간에게로 왔다. 바이러스와 인간의 크기 차이는 지구와 인간의 크기 차이와 비슷한데, 지금 바이러스가 인간을 파멸시키는 모습에서 인간이 지구를 파멸시키는 모습이 겹쳐 보인다.

1950년을 기점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활동이 급격히 가속화되고 전체 생명체에서 0.01%의 비율만을 점유할 뿐인 인간이 지구 전체 시스템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여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 같은 지구의 시스템적인 반응이 야기되었다.

지구의 기온은 호모사피엔스가 태어난 20만년부터 2만년까지는 오르락내리락 격하게 변하다가 1만 7천년, 인류가 정착생활을 시작한 시점부터 갑자기 지구의 평균기온이 안정적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인류문명의 건설이라는 것이 인간의 온전한 능력으로 이뤄진 것이라기보다는 지구의 기후가 안정화되는 ‘Stable background’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봐야한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인간의 활동이 지구의 시스템에 영향을 줄 정도로 초가속화되자 이제 반대로 인류문명을 향해 지구가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지금의 기후변화와 바이러스 창궐이다.

한편, 우리는 바이러스를 침입자라고 생각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알게 된 것은 이미 우리들은 이들과 함께 살아왔었다는 자각이다.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여 이 지구위에 인간만이 살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해 왔지만, 사실 인간은 지구 껍데기에만 살고 있었을 뿐 땅속에서도, 바다 속에서도 하늘에서도 살지 못한다. 이 지구에는 인간 말고도 수만, 수억 개의 생명체가 상호작용하고 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집, 안식처라고 생각되었던 지구에서 인간 말고도 수만, 수억 개의 생명체가 함께 지내왔다는 자각. 코로나로 인해 Stay home을 외치지만, 그 Home이라는 지구가 더 이상 인간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고 지금! 자연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문명을 버리고 ‘자연으로’ 되돌아 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마블시네마의 타노스처럼 인류의 절반을 지구상에서 내쫒아야만 할까? 모리타 마사오의 지성은 여기에서 한번 더 높은 수준으로 도약을 한다.

우선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자연을 구성하는 나머지 99.00%의 생명체가 하는 말을 들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불과 50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벌레나 흙, 바람, 비 등의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듣고 살았는데, 도시가 비대해지면서 인간의 소리만을 듣고 자라게 되었고, 그렇게 인간중심주의로 무장한 사람들이 드디어 세상을 폭력적으로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했으나 모든 것의 정점에 있다는 그 ‘위치선정’이 지금 이 순간 인간을 기능부진으로 만들었다. 이제부터는 시점을 낮춰서 대지를 바라보고, 벌레를 만나는 등 인간 이외의 것들과도 상호작용하는 자세를 길러야만 한다.

하나의 예로 협생농법이라는 것이 있다. 하나의 땅에 같은 작물들을 심어 생산성을 높여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것에만 매몰되어 땅의 기운을 소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땅에 200 종류의 작물을 심는 행위를 통해 오히려 자연의 기운을 북돋는 기법이라고 한다. 인간과 자연이 관계 맺음으로서 자연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태계가 활발해지고 풍부해지게 하는 것이다.

지금의 아이들은 “인간이 지구에서 암적인 존재”라는 이데올로기를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고 있다. 멀리 않은 미래에 타노스와 같은 사상을 가진 어른이 출현할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활동으로 자연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관계맺음으로 생태계가 활발해지고 살아난다는 것, 그래서 인간에 의해 지구가 좋아진다는 걸 아이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래야 아이들에게 “인간이 지구에 있어야 한다. 있어도 좋다. 있어야만 한다.”라는 용기를 심어줄 수 있다.

인간은 애벌레와 같다. 나무가 없어질 때까지 나무를 갉아먹을 뿐이다. 마치 인간이 지구를 황폐화시키는 것처럼. 그런데 놀라운 점은 애벌레가 나비로 변했을 때이다. 이전까지 나무를 파괴하기만 했던 애벌레가 나비로 변태하자 이제 나무를 살리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떨어져 있는 식물들을 매개하여 나무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은 엄청난 변화이다. 이제 인간도 그 정도의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마음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제부터 인간이 있음으로서 해서 지구가 풍요로워 질 수 있도록 나비가 되어야만 한다.

20세기는 석탄의 힘으로 세상을 돌아가게 했다면, 이제 21세기는 인간이 가진 마음의 힘으로 세상을 움직여야만 한다.

와... 정말 연주회에 참여한 내내 놀라서 벌어진 입이 쉽게 다물어지지 않았다. 코로나 사태를 통해 Home에 대한 개념을 정교화하고, 인간의 활동으로 야기된 지구적 시스템의 변화를 다시 인간의 활동으로 바로잡자는 것으로 생각을 전개하다니...


한번도 접하지 못했던 지성의 매력에 푹 빠져든다. 특히나 기후변화와 바이러스 창궐을 통해 아이들이 인간존재를 부정하게 될 수도 있다는 지적에 가슴이 철렁하였다. 듣고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어벤져스에 나오는 타노스가 가까운 미래에 출현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꼭 타노스처럼 막강한 힘을 가진 개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저지른 최악의 악행 중 하나인 ‘홀로코스트’가 타노스적 사상으로 재현될지도 모르는 것이고 말이다. 미래에 출현할지도 모르는 타노스 같은 누군가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지금의 교육을 끌어온다면 나는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책임을 추궁당하는 순간이 올 때 어쩌면 나 역시 아이히만처럼 시대정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주어진 일만 최선을 다해서 했을 뿐이라고 변명하려나...


‘아이들에게 인간이 지구에 있어야만 한다’라는 용기를 주는 것이 꼭 필요하고 그러한 마음의 힘으로 세상을 건강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는 모리타 마사오의 놀라운 지성.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꾸준히 만나게 될 거라는 사실에 내 정신에 빛이 내리쬐는 기분이 느껴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