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지선생 [교육교육열매:초인계]

[TOB in 교육]초등 학습력의 비밀:엄마 도움 없이 공부 잘하는 아이, 뭐가 다른 걸까?-학습이란 무엇일까? 그나저나 너무 노골적이라서 민망하지가 않은 건 신기한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코로나’가 나타나 전 지구를 뒤덮고 거의 완벽한 진화의 ‘최종단계’라고까지 여겨졌던 ‘근·현대 문명’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심리적 영역에서는 이미 상당히 진행된 ‘관계의 단절’, ‘공동체의 파괴’, ‘개인의 고립’이 코로나로 인해 물리적 영역까지 확대되는 중이다. 예전과는 달리 누군가 ‘고립’과 ‘단절’을 지향한다고 당당히 자기 생각을 표현하더라도 ‘사회성 부족’이나 ‘내성적’,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에 잘 적응하고 있으며 ‘미래 지향적’, ‘이타적’인 것이라고 평가받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자율 격리’와 ‘온라인을 통한 새로운 관계망 구축’이 올바른 가치관으로 칭찬받는 분위기다.


교육의 영역으로도 이러한 사회 분위기의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아니 애초에 교육의 영역에는 외부로부터의 무분별한 침입을 막아줄 그 어떤 차단막(합의된 우리의 교육 철학, 우리의 교육적 신념 등)도 존재하고 있지 않기에 밀려 들어왔다는 표현보다는 눈 한번 깜짝했을 뿐인데 교육의 영역은 이미 사회의 주류 분위기와 같아져 있었다고 해야 정확할 것만 같다. ‘만능키’인 ‘학생 안전’이라는 키워드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원격수업 전환’이 결정되었고, 한밤중에 언론을 통해 그 방침이 공개되면서 그냥 그렇게 전국의 모든 학교는 ‘온라인 수업’에 돌입하였다.


온라인 수업의 가능 여부는 ‘교육의 본질’, ‘아동의 발달’, ‘배움의 원리’ 등의 관점에서 논의되기보다는 ‘플랫폼과 서버의 능력’, ‘기자재의 유무’, ‘수업의 방법과 형태’ 등의 수준에서만 이야기되고 결정된 것처럼 보인다. 아마 교육의 ‘본질’적 모습을 생각했다면 온라인 수업 자체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본질적 모습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말이다. 나는 ‘온라인 수업’을 하는 것이 코로나 상황에서는 당연한 거라는 생각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안전’만 고려했을 때는 금지되어야하지만 ‘본질’을 헤치지 않기 위해 허용되는 것들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크게는 경제의 수레바퀴를 멈추지 않는 것이 대표적이다. 거의 모든 국가에서는 재택근무나 1/3 근무, 20인 이상 집합 금지 등의 단계별 안전장치 속에서 경제가 돌아가게 하고 있다. 즉, 공장 가동 완전 중지 같은 결정은 결코 하지 않는다. 공장의 기계를 오로지 원격으로 조정하고, 제품을 원격으로 유통시키는 등의 완전한 무인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또한 방송을 보더라도 현장 인원을 최소한으로 한다거나 관객을 없애거나 하는 식의 안전장치를 둘 뿐 진행자와 출연자가 ‘현장’에서 직접 만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녹화하여 방송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즉, 온라인 플랫폼이나 전화 연결로 진행자와 출연자가 원격으로 만나는 프로그램은 없다. 심지어 어떻게 보면 ‘온라인’에 가장 친화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회의’, ‘청문회’, ‘국정감사’ 등도 국회에서는 차단막을 두거나 취재기자를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등의 안전장치 속에서 ‘현장’에서 진행되지 ‘줌’같은 프로그램을 통한 다중 화상 회의로 진행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답은 간단하다. 왜냐하면 원격을 통해서는 불가능한 영역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비대면’은 ‘본질’에 어긋나니까 그랬을 것이다. 그밖에 식당, 대중교통, 마트 등 ‘안전’만 생각했을 때는 전면 금지가 맞지만 ‘본질’을 헤치지 않기 위해서 ‘각각의 특성을 고려한 안전장치를 마련'한 후 허용하는 것들은 무수히 많다. 이와는 달리 학교에서는 점점 ‘온라인 수업’이 확대되려고 한다. 이제 ‘원격수업’은 시대적 과제라는 전제하에 어떻게 하면 ‘온라인 수업’을 잘 할 수 있을까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원격수업’이 ‘교육의 본질’을 헤친다는 생각 자체가 없으니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뭘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생각하느냐?’ ‘대면 수업을 하면 좋은지 누가 모르냐? 코로나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으니까 안전을 생각해서 온라인 수업을 하는 것이지.’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런 예를 들고 싶다. 최근에 국회에서 ‘태권도 관장님’들이 성명을 발표했다고 한다. 실내체육시설 집합금지명령 때문에 학원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대책을 마련해 달라는 ‘성명’이었다. 그런데 만약 정부에서 이에 대한 대책이랍시고 ‘태권도 수업’을 ‘온라인 실시간 원격수업’으로 진행하는 방법으로 학원 수업을 진행하라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발레 학원’에 대하여 집합금지명령을 유지하고 온라인으로 수업하라고 했다면?, ‘헬스장’에 대하여 집합금지명령을 더 연장할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온라인 프로그램으로 운영하라고 했다면? 등등.


아마 장난치는 줄 알고 어이없어하거나, 잘못된 대책이라면서 정부에 대한 비판 성명을 추가로 발표하지 않았을까? 내 생각에는 그럴 것 같다. 왜냐하면 ‘본질’을 헤치고 있기 때문이다. 체육활동은 몸을 움직여야 하니 집에서 온라인으로 진행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제한점이 생길 것이고, 함께 활동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 ‘태권도’, ‘발레’, 어쩌면 ‘헬스’도 각자 집에서 모니터를 보고 혼자 활동하게 되면 죽도 밥도 안 되게 될 수 있으니까 그렇다. 그런데, 왜!!! 학교가 온라인으로 원격수업을 한다고 했을 때는 아무도 어이없어하거나 본질을 헤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없었을까? 또는 온라인 수업에 대한 불만 표시는 고사하고 심지어 4차 산업혁명의 미래 교육이 앞당겨졌다며 좋아하는 이도 심심찮게 보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답은 자명하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교의 수업이란 온라인으로 진행되더라도 실시간으로 피드백이 가능한 상태에서 양질의 영상을 학생들이 수신할 수 있다면 문제없다고 생각하니까 ‘원격수업’이 가능하다고 여긴 것이다. ‘교육의 본질’, ‘아동의 발달’, ‘수업의 과정’ 등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조금이라도 해 보았다면 ‘등교해서 대면 수업하는 것이 제일 좋긴 한데, 코로나니까 어쩔 수 없다.’가 아니라 ‘등교 후 대면 수업은 꼭 해야만 하는 거니까, 대면 수업을 하면서 안전을 확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한편, 이미 ‘온라인 활동’이 번성한 곳이 있다. 바로 사교육이다. 수능을 위한 인터넷 강의에서부터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한 인터넷 강의까지. ‘실시간 원격수업’은 사교육 시장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람들에게 각종 시험 준비를 위한 ‘온라인 수업’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심지어 오프라인으로 모여 무려 온라인 수업을 듣는 일조차 엄청 많아졌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몇 년 전에 찍어둔 인터넷 강의를 광주에 있는 학원의 빈 강의실에 모여 스크린에 재생시켜 듣는 식의 형태이다. 나는 처음에 그런 식의 수업이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 곧바로 이상함을 느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었다.



사교육에서 인터넷 강의의 인기와 높은 효용성과는 별개로 ‘좋은 교육’, ‘진정한 교육’, ‘추구해야 할 교육’ 따위를 이야기할 때면 늘 사교육이 나쁜 예로 활용되며 그것과 반대로만 하면 정답이란 식의 말들이 나오곤 한다. 시험점수를 위한 공부가 아닌 성장을 위한 공부, 경쟁을 위한 공부가 아닌 협력을 위한 공부, 지식의 전달과 암기를 하는 공부가 아닌 지식 활용 또는 창조를 하는 공부 등등. 교육이 변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와 비슷한 말들을 한다. 그렇지만 이번 ‘온라인 수업 전환’과 ‘양질의 실시간 원격수업을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볼 수 있듯 사실 우리 사회는 교육을 ‘시험 준비’와 분리시켜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암죽식 수업', '전달-암기 모형 수업'에 최적화 되어 있어 소위 '사교육'의 영역에서나 적합한 '온라인 수업'을 학교교육에 전면적으로 도입하는데 아무런 저항감이 없는 걸 보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시험 준비가 교육의 본질이자 모든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겉으로는 ‘시험 준비’는 교육이 아니라고, 아니어야만 한다고 말하면서 진짜 속마음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의 교육담론을 살펴보면 ‘교육 혁신’이라는 말과 함께 이미 상투적 표현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주 말하던 ‘학생 중심 교육’, ‘학생 주도 학습’, ‘(학생)활동 중심 교육’ 같은 구호와 그 속에 필수적으로 포함되던 ‘학생’이라는 단어가 실종되고 ‘교사의 수업 형태가 실시간이냐 과제 제시형이냐’, ‘학부모 만족도가 높냐 낮냐’, ‘열심히 하는 교사도 있지만 무임승차하거나 무능하고 나태한 교사도 많다.’ 등 교사와 학부모만 이야기하고 ‘학생’이라는 단어는 잘 보이질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학생의 실종’은 원격수업을 미래 교육으로 나아갈 좋은 기회로 보는 사람이든, 원격수업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든, 또는 원격수업을 통해 항상 해오던 ‘선생’에 대한 비난을 더욱 강화한 사람이든 간에 모두에게 똑같이 나타난다. ‘학생’이 교육에 있어서 1순위 고려대상이라는 말은 ‘안전’에만 한정된 것이라는 듯 ‘원격수업’에 대한 논의에서 ‘학생’은 사라졌다.


...사실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하나 있으니까 말이다. 바로 ‘학력’을 말할 때는 ‘학생’이 포함된다. 아니 딱 오로지 그때만이다. ‘학력 격차’, ‘학력 저하’ 등의 단어에는 앞에 ‘학생’이 들어간다. 참 혼란하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학력에 대하여 무가치하고 비효율적이며 비인간적이기 때문에 ‘역량 중심’, ‘실생활 중심’으로 나아가는 것이 올바르다고 말해왔었다. ‘학력’에 의한 서열화와 차별이 문제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코로나 시국의 교육적 논의에서 ‘학생’과 관련된 유일한 ‘말할 거리’가 ‘학력’뿐이라니... 참 씁쓸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최근 몇몇 선생님들 사이에서 ‘학력 격차가 문제가 아니라 발달 격차가 문제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좀 더 지켜봐야 확실해 지긴 하겠지만, 일단 지금까지 본 바로는 ‘학력 격차’를 보고 큰일이 난 것처럼 떠들썩했던 것과는 달리 ‘발달 격차’에는 별다른 사회적 반응이 없는 것 같다. 발달의 지연이나 지체는 별 문제가 아니고, 오로지 학력의 객관적 징표인 ‘점수’만 높으면 된다는 듯 말이다.


코로나에 의한 ‘강제된 온라인 수업’과 ‘실시간이냐 과제 제시냐 논쟁’ 등의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지금껏 쌓아왔던 개념들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교육’이란 무엇인지, ‘발달’이란 무엇인지, ‘학력’이란 무엇인지, ‘학습’이란 무엇인지 말이다. 어딘가 잘못된 것은 분명한데... 이쯤 되면 내가 잘못된 것이다. 나만 다른 별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 책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초등 학습력의 비밀’이 제목이다. 부제는 ‘엄마 도움 없이 공부 잘하는 아이, 뭐가 다른 걸까?’라고 한다. 어마어마한 책이다. 누구나 관심 있는 영역의 비밀을 파헤칠 것을 선언하면서 ‘엄마 도움 없이 (스스로)’라는 매력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엄마 도움 없이’가 완전 시선 강탈이다. 왜냐하면 저 단어 속에서 ‘가성비’, ‘고효율’, ‘저투자 고수익’ 등으로 표현되는 ‘자본주의’, ‘물질주의’의 냄새가 강렬하게 풍겨 나오기 때문이다. 교육의 영역에서는 보통 ‘과정이 더 중요하다느니’, ‘모두 같은 결과를 지향하기 보다는 각자의 개성과 속도라느니’ 하는 식의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며 점잔을 빼게 마련인데, 이정도로 노골적으로 ‘엄마 도움 없이 공부 잘하는 아이’라고 해버리니까 오히려 신선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렇게 대놓고 ‘교육의 물질주의’를 표방하니까 오히려 민망하지는 않아서 좋다. 이 부분은 내가 너무 나갔거나 삐뚤어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걸 인정한다. 자기주도성을 강조하기 위해 '엄마 도움 없이'라는 단어를 썼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이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적합한 도움을 계속 줘야 한다는 걸 자연스러우면서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높은 시험점수를 척척 얻어내고 있다면 어른의 도움이 없어도 괜찮고, 그래서 좋은 결과(명문학교 진학, 높은 시험성적 등)를 다른 부모들보다 편안하게 얻을 수 있다는 식의 흐름이 왠지 아이를 '품질 좋은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동은 투자의 대상이라거나 상품이 아니다. 어른의 관심과 도움을 양분으로 성장하는 '생명'이다.

어쨌든 ‘학습’이란 무엇인지, ‘교육’이란 무엇인지, ‘실력’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보통의 상식’을 알아보고 싶다는 강력한 동기에 이 책 ‘초등 학습력의 비밀’에 사로잡혔고, 나는 책을 펼치고 나서 한번에 끝까지 쭉 읽을 수 있었다.

1. 학습력은 측정 가능한가? 그렇다면 어떤 도구로 진단하고, 비교할 수 있는가?

책에서는 ‘비밀’을 파헤치는 시작에 앞서 학습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부터 설명하고 내용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명확하게 정의내리고 있는 학습력이란 ‘학습에 있어서 높은 성취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학습을 공부와 동의어로서 수업시간에 책상에 앉아서 하는 일이란 뜻의 ‘일반명사’로 사용하는 것 같고, 문제는 성취인데... 고맙게도 성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첫 장인 저자 서문에서 쉽게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초등 교사인 아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반에 공부를 아주 잘하진 않는데, 내 말을 귀담아들을 줄 알고 스스로 할 일을 찾아서 하는 아이가 있어. 그래서인지 온라인, 오프라인 수업을 병행해 나갈수록 눈에 띌 정도로 성적이 엄청나게 향상되었어.’ 그리고 아내는 다른 아이 이야기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상위권에 있던 달이가 중위권이었던 별이에게 밀렸다는 거야.’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도대체 무엇이 별이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명확해진 ‘학습력’이란 ‘학습을 통해 높은 시험점수를 얻어내는 능력’이라고 결론 내려진다. 그런데, 저자의 지필동기와 문제의식이 형성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적이 향상된 별이와 성적이 떨어진 달이 이야기’는 어딘가 이상하다. 이상함을 느끼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 위 에피소드를 듣고 뭔가 고개가 갸웃거린다면 아마 그 사람은 ‘선생님’, 그것도 ‘초등학교 선생님’, 더 정확히는 초등학교 선생님들뿐이라고 예상해 본다. 2020년 현재 대한민국 초등학교에는 ‘성적’이라는 용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전에 학교에 다녔던 모든 사람들에게 익숙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따위의 일제고사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학교교육이 지필평가를 통해 단일한 기준인 성적(점수)으로 줄을 세워 학생을 평가하고 비교하던 방식에서, 수행평가(성취기준)와 평가결과의 서술형 기술을 통해 다양하고 개성 넘치는 아이들의 특기와 적성을 살려주는 도구로서 평가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변화하면서 그 강력한 의지표명의 일환으로 ‘시험’을 폐지한 것이다.



시험이라는 도구가 사라진 학교에서는 곧바로 학생들의 학습동기를 이끌어내는 방식, 학생 개개인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방식 등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렇게 하면 점수가 오른다. 그렇게 하면 점수가 떨어진다.’, ‘이렇게 하면 점수가 오를 것이다. 이것만 고치면 점수가 오를 것이다.’라는 것처럼 ‘성적’으로 학생을 자극하거나 통제했던 것에서 ‘점수’가 사라지자 ‘이렇게 하면 즐거울 것이다. 그렇게 하면 더 즐거울 것이다.’, ‘이렇게 하면 좋아하는 걸 잘할 수 있게 된다. 이것만 고치면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식으로 학생 존재에 대해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열화 할 수 있는 ‘점수’가 사라지자 성적으로 줄 세우는 것을 통해 학생들을 1등인 아이, 중간인 아이, 꼴등인 아이로 인식했던 것에서 집중 잘하고 공책 정리 잘하는 아이, 체육시간에 날아다니는 아이, 만화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 등으로 바라보는 방식이 변화되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제고사 폐지’의 정책 입안자 의도대로 정확히 그렇게 말이다. ‘도구’의 힘은 어마무시하다. 어떤 ‘안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것들이 보인다. 고작 ‘시험’하나 없어진 것이 뭐 그리 대수냐가 아니라 ‘시험’하나 없앴을 뿐인데 많은 게 변한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저자의 에피소드에 나온 ‘별이’의 경우는 어떤 ‘도구’로 성적이 향상된 걸 확인할 수 있었던 걸까? 학생 한 명의 ‘성적’은 수업 시간 관찰평가로 어느 정도 유추한 것이라고 치고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한 학생의 성적이 다른 학생의 성적에게 ‘밀렸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되었다는 걸까? ‘밀렸다’라는 표현은 완벽하게 ‘서열화’의 언어이다. 일제고사 같은 평가도구로 서열화하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표현이다. 내가 이 에피소드를 이상하다고 여긴 것은 사실 저 단어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에게는 ‘일제고사’가 사라져버린 후 같이 사라져버린 능력이 아직 다른 선생님에게는 마치 ‘초능력’처럼 남아있는 걸까? 놀라움을 느꼈다.




고백하면서 마무리 하자면 나는 ‘밀렸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학생을 서열화할 수 있는 도구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 전부터 그러한 능력을 키우는데 소홀했다. 만약 ‘서열화의 도구’가 사라지기 전부터 도구가 없어도 될 정도로 능력을 키워 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일제고사’가 사라진 지금도 ‘서열화’가 가능할지 모른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해준 ‘에피소드’에서는 그 증거를 보여주었다. ‘서열화’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닐 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긍정적인 질투의 힘’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 에너지와 동기로 ‘책상’에 앉아있게 됨으로써 일종의 ‘성취감(성적 향상)’을 느끼게 있다면, 그게 변화의 모멘텀이 되어 긍정적인 전이 효과가 일어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궁금하다.


학습력은 측정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어떤 도구로 진단하고, 비교하는가?

2. 과학의 안경을 통해서는 인간과 교육이 숫자로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걸까? 과학의 눈으로 인간과 교육을 숫자 그 이상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이 책은 ‘심리실험’을 통해 소위 ‘학습력의 비밀’을 파헤친 책이다. 과학적 연구를 통해 증명된 ‘정확한 답’을 크게 4가지 학습력, 즉 ‘초인지를 기르는 자기주도성’, ‘집중력’, ‘뇌과학과 공부 습관’, ‘자존감’으로 나누어 제시하고 있다. 저자가 찾아낸 ‘학습력의 비밀’은 그래서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다. 수치화된 실험들로 증명된 사실들을 토대로 ‘학습력’을 크게 4가지로 분류하고, 그것들을 또다시 10가지씩 세분화하여 공부를 잘하는 방법과 이를 통한 높은 시험성적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책의 구성을 보니 저자가 ‘학습력’이라는 것의 의미를 ‘공부를 통해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힘’이라고 한정하여 정의내린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과학적 결론에 다가가려면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증거, 즉 변인 통제를 통해 도출된 수치에 집중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생긴다. 최근 교육혁신의 방향과는 반대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핏 학생에 대한 이야기만 있기에 ‘학생 중심’, ‘아동 중심’의 흐름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 보여도 그렇지가 않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수치는 개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숫자로 표현되는 순간 ‘동질집단’이 되어버린다. 예를 들어 A그룹은 80점, B그룹은 50점이라고 해버리면 A그룹의 모든 구성원을 그저 한 덩어리로만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개개인이 가진 역동성과 예측불가성, 더 나아가 학생과 학생, 학생과 교사의 만남을 통한 상호 관계성 등은 철저하게 가려진다.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다양한 창의적 개인이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최근의 교육혁신의 흐름이라고 했을 때 객관화된 수치와 이를 통해 증명되는 사실들, 그리고 그 사실들을 추구하는 것으로 ‘성적’을 높이려고 한다는 건 오히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의 과거 개념이다. 추가로 학습을 통해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성취물로서 얻어내는 능력을 ‘부모’의 도움 없이 스스로 쟁취해 내는 아이를 기대하게 한다는 것은 또 완전 최신의 트렌드라서 그 신구의 조화가 너무 놀랍고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물론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초등학습력’이 학생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능력 중 하나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현실 세계에 발을 딛고 일어서는데 필요한 ‘힘’들 중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족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초등 학습력의 비밀’의 통해 아이들에게 ‘엄마의 도움 없이도 높은 성적을 얻을 수 있는 힘’을 갖게 해 주었다면,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다음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다음이란 그러한 과학적 방법으로 ‘성적’이 아니라 ‘아이’, 즉 ‘인간’의 비밀을 드러내는 작업을 말한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보편성에 대한 연구와 보편성을 통해 드러나는 개별성을 연구함으로써 초등 학습력의 비밀 시리즈가 이어지는 걸 상상해 본다.


‘2탄 : 교육의 비밀’, ‘3탄 : 학생이라는 존재의 비밀’, ‘4탄 : 교사라는 존재의 비밀’, ‘5탄 : 인간 존재의 비밀’ 등등. 현직 교사가 쓴 전교 1등의 비밀, 현직 교사가 쓴 공부 잘하는 법 같은 책도 좋지만 현직 교사가 쓴 인간 존재의 비밀 같은 책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여담이지만 그렇게 될 때만이 우리 사회가 교사를 ‘교육 전문직’이라고 인정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교육 전문직이라면 ‘교육 담론’의 방향도 이끌어나갈 수 있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교육에 있어서 진정한 기회라고 봐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의 저자는 위기는 곧 기회라고 하면서 지금 이 코로나 상황이 우리 아이의 공부 습관을 자기주도적으로 만들고 자존감을 높여, 결과적으로 학습 성취를 높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일 수 있다고 하였다. 정말 그런가? 코로나 초기 ‘온라인 원격수업’이 나오면서 ‘이제 출석의 시대는 종말을 맞이했다.’라고 고무되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아침에 힘들게 일어나서 정신도 없는 상황에서 출석시간이 되었다고 일률적으로 수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듣고 싶을 때나 들을 수 있을 때, 하고 싶은 공부부터 먼저 집중해서 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온라인 원격수업’이 미래 교육으로 향하는 열차를 출발하게 만들었다고 기뻐했다.


하지만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현 시점의 ‘온라인 원격수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에 하나는 다름 아닌 ‘출석체크’가 되어 버렸다. 미래 교육을 외치면서 ‘출석의 시대의 종말’을 이야기했던 사람들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나는 ‘학습력’이라는 주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코로나 시대에 교육을 마주함에 있어 “역전(석차)”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쟁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느려진 발걸음을 좋은 기회로 여기고 그동안 서열화에 의한 경쟁 때문에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교육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는 게 좀 더 나은 선택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코로나’가 오기 전에 학교는 ‘혁신’을 꿈꾸고 있었다. 지금 다시 ‘성적 잘 받는 법’ 따위에 집중한다면 ‘출석의 시대’를 끝내고 미래 교육으로 나아가자는 목소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교육을 바꾸자’라는 목소리도 ‘코로나’가 끝나게 되는 머지않은 미래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이제 ‘교육의 비밀’로 나아갈 때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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