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지선생 [교육교육열매:초인계]

[TOB in 인문]과학의 품격을 읽고, 품격있는 삶에 대해서 생각하다니... 내가 왜 그랬을까?-지적 허영심, 이기주의, 선민의식 그리고 연대의식과 책임의식에 대하여...

내가 왜 그랬을까? 참 이상한 일이라 그저 우연이라고 여기고 지나쳐도 될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되돌아보면 아마도 그건 이 책의 제목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의 제목이 얄궂게도 ‘과학의 품격’이니까 말이다. 과학이라는 단어와 품격이라는 단어는 근사하게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면서도 미묘하게 어긋나 보이기도 한다. 그 조그만 틈새가 만들어낸 어색한 기운이 나의 마음에 커다란 풍파를 불러일킨 것만 같다. 다시 시간을 돌려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가 본다. 표지에 있는 작가의 이름이 어딘가 눈에 익었다. 평범한 이름이 아니어서 그런가? 혹은 남자라면 본능적인 위축감을 불러일으키는 ‘지명’이 작가의 이름이라서 그랬을까?


처음에는 그저 작가의 이름이 어딘가에서 본 것 같다는 느낌만 있었을 뿐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책을 읽기 시작한지 2일쯤 지나고 나서다. 일단 읽어나갈 뿐이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황우석 줄기세포 조작사건’을 세상에 알렸던 본인의 무용담이고, 두 번째는 본인이 2년간 기고했던 ‘에세이’들의 모음이다. 이 책의 구성 상 ‘황우석 줄기세포 조작사건’을 파헤친 이야기부터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야기를 읽어가는 초반부터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쌓여갔다. 그 이유는 은근히 ‘노무현 정부’를 힐난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줄기 세포 조작 스캔들’에 불을 확 지른 이가 노무현 대통령이었다느니, 노무현 대통령이 모두가 ‘설마’하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PD수첩’에 대한 반발 여론이 더욱 심해졌다느니, 몰락한 황우석 박사의 연구원 기공식에 노무현 대통령도 참여했다느니, 황우석 박사 지지자들이 노란 손수건을 들고서 황우석 박사를 환영했다느니, 노무현 대통령이 일부 참모들의 반발에도 황우석 박사의 손을 잡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느니 하는 말들을 하면서 말이다.


‘모두가 노무현 탓’이라는 유행어로 대표되는 그 당시 일그러졌던 사회 분위기, 지금 와서 객관적 데이터로 돌이켜보면 많은 것이 터무니없는 왜곡과 조작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 상당수가 동조하며 힘을 보탰던 누구나 알고 있는 사회 분위기, 바로 그 분위기에 편승하거나 더 나아가서는 그런 분위기를 조장하고 강화시킨 사건들 가운데 '황우석 줄기세포 조작 사건'도 그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위화감과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책의 절반 정도를 읽었을 때 ‘서점 나들이’를 가게 되었다. 딸아이의 동화책을 사러 간 것이기에 딱히 내가 목표로 하는 책이 없었다. 딸아이가 자신의 책을 고를 동안 산책하는 기분으로 진열되어 있는 책들을 쭉 돌아보았다. 그러던 중 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더 정확히는 책 표지에 있던 ‘저자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이 책의 저자와 같은 이름이 베스트셀러 진열대에 놓인 책 표지에 박혀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른바 ‘조국흑서’라고 불리는 책이었다.


마케팅이란 이렇게 잔인해도 되는 걸까? 조국백서와 조국흑서를 나란히 진열해 놓은 마케팅 스킬에 씁쓸한 뒷맛이 느껴졌다. 어쨌든 왠지 익숙하다 했더니 이 책 ‘과학의 품격’의 저자가 바로 ‘조국흑서’의 집필진 중 한사람이었다. 그래서 눈에 익었던 것이다.

1. 언론이 제공하는 정보의 ‘진실성’을 개개인이 일일이 품을 팔아 검증해 보고 ‘판단’해야 하는 시대.

‘가짜뉴스’라는 말이 ‘기자’를 비하하는 의미의 ‘기레기’와 더불어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 잡게 된 것도 꽤 오래 전 일이 되었다. ‘가짜뉴스’는 뒷구멍으로 돌려보는 찌라시나 SNS 단톡방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중파를 통해 수신되는 TV 뉴스와 은행이나 동사무소 같은 곳에 매일 배달되는 종이 신문 등의 레거시 미디어에서도 쉽게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뉴미디어’는 뭐... 말할 것도 없다. ‘사법거래 사건’, ‘공공연한 판, 검사 전관비리’ 그리고 가장 최근의 ‘채널 A 검언유착 사건’과 ‘라임·옵티머스 사건’을 비롯해서 시간이 지나서야 진실이 밝혀지고 있는 ‘한명숙 사건’, ‘논두렁 시계 사건’, ‘세월호 사건’, ‘이명박 구속’ 등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경험이 쌓여가면서 이제 정보의 출처가 검찰이나 국정원 같이 공신력 있는 국가기관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언론’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라면 일단 ‘판단’을 유보하고 ‘진실성’여부를 개개인이 혹은 그러한 개인들의 연대 안에서 교차검증을 통해 따져보는 것이 중요해졌다.


완전한 ‘거짓’정보나 ‘허위’정보에서부터 ‘왜곡’, ‘과장’, ‘물타기’, ‘관점 흐리기’ 등의 교묘한 장난질까지 그 모습도 다채로운 이른바 ‘가짜뉴스’가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러한 ‘가짜뉴스’로 야기된 수많은 혼란이 존재하는 상황 하에서 여전히 ‘뉴스에 나온 것은 무조건 진실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좋게 말하면 극단적으로 순진한 것이고,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지적으로 게으른 것이다.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 구분할 수 없다면, 기본적으로 모든 정보를 ‘한발 떨어져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성실한 태도일 테니까 말이다. 2019년. 이른바 ‘조국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하나의 대상을 목표로 초 집중된 언론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기사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일단 언론기사의 극단적 편향 자체에 불편함을 느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뭐 그건 그냥 넘어간다고 치고 ‘조국 사태’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이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어 진다는 걸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검찰이 주된 출처였던 거의 모든 언론의 ‘조국 비판기사’에 나오는 ‘정보’들에 대해 뉴스에 나온 것이니 일단 그 ‘정보’들을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전제한 상태에서 ‘공정’, ‘정의’, ‘위선’의 단어로 ‘조국’을 비난하거나 혹은 ‘양비론’으로 ‘조국’과 ‘검찰’ 양쪽 모두를 비난하는 사람들이고 두 번째는 다양한 경로와 방법으로 직접 언론이 쏟아낸 정보들의 진위여부를 검증하고 난 뒤 그렇게 교차 검증된 사실들 속에서 실체적 ‘진실’을 재구성해 낸 뒤에 ‘폭주하는 검찰’과 ‘편향된 언론’을 비난하는 사람들이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전제로 삼고 있는 ‘사실’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각자가 믿고 있는 ‘진실’에 교집합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대화를 통해 ‘가치평가’에 대한 생산적인 논쟁과 합의를 이뤄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대화를 거듭할수록 감정적인 비난과 인격모독이 심해지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자명한 ‘사실’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대방의 ‘인식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기 때문이다. 멍청한데 고집만 강해서 맹목적으로 자기편만 감싸고 도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으니 ‘미움’이 싹을 틔우고 쑥쑥 자라 ‘독 사과’가 열린다. 서로 상대편이 멍청하다고 욕하고 있는 상황이라 나의 의견도 그저 한쪽 편들기로 취급받을 수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평가를 말해보자면 나는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 중 하나인 ‘조국흑서 편찬위원’들을 ‘지적으로 게으르다’고 생각하고 있다. 가짜 뉴스가 상당수의 언론을 뒤덮고 있다는 증거가 차고 넘치는 상황에서 ‘언론’에 나오는 정보를 그냥 그대로 사실이라고 전제하거나 또는 그 정보가 맞다고 주장하는 쪽 ‘사람’의 말에만 의지하여 자기 논리를 구축한 뒤 가치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순수하고 고매한 상태로 완전히 독립된 개체로만 살아가려고 하는 개인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democracy’는 민주주의라는 말로 번역되어 그 의미를 이해함에 있어 다소 오해가 생겼다고 한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매우 추상화된 표현이 ‘현실과 괴리’된 정치를 혐오하고 일상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주인이고, 너는 주인이 아니다.’라는 배제의 언어와 ‘순수한 국민’, ‘진짜 국민’, ‘편향되지 않은 국민’ 따위의 편 가르기가 정치의 현장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될 수 있는 것이 바로 ‘democracy’가 ‘민주주의’로 번역되어 유통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태이다.


본래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democracy’가 ‘다수지배’라는 말로 수입되었어야만 한다고 한다. ‘democracy’를 ‘다수지배’라는 말로 번역하지 않고, ‘민주주의’로 번역한 일본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면서 ‘국민이 주인’이라는 달콤하지만 실체가 없는 말이 ‘democracy’의 진짜 모습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숫자에는 이념이나 계급과 신분이 있을 수가 없다. 다수의 동의와 소수의 이견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숫자는 고정불변하지도 않다. 지금은 내가 다수의 숫자에 포함되어 있지만, 갑자기 소수의 숫자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모두가 숫자 중 하나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나도 언제든 소수가 될 있기에 패배했다고 해서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다는 사회적 약속에 의해 보호를 받는 것이 가능하다. 결국 다수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니까 대화와 설득, 그리고 타협이 필수적인 요소로서 사회 시스템의 바탕이 된다.



이와 달리 ‘국민이 주인’이라며 ‘사람’에 집중하게 되면, 왠지 ‘숫자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인간적이고 고상할 것 같지만 현실은, 지금 우리나라가 그렇듯 ‘순수한 국민 VS 가짜 국민’ 이데올로기로 상대방을 함께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절대 인정하지 않으면서 혐오의 표현조차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게 된다. 또한 ‘국민이 주인이라는 말과 달리 전혀 주인 같은 느낌을 받지 못하는 현실과의 괴리’에 실망하여 정치에서 멀어지는 대중이 탄생하게 되고, 점점 주인 대접을 못 받는 상황이 악화된다.



‘민주주의-국민이 주인’이라는 멋들어지고 그럴싸한 말로 다수를 기만하여 ‘소수 특권층의 지배’를 영속되게 하지 않으려면, 그래서 ‘democracy’, 즉 ‘다수지배 사회’가 발전하고 ‘진정’으로 ‘모든 권한이 국민’으로부터 나오게 하려면 순수한 ‘진짜 국민’을 찾으려고 허상을 좇는 것이 아니라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다수 지배’가 공정하고 정의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사회 시스템을 ‘다수결의 원리’가 객관적으로 지켜질 수 있게 유지하려는 노력에 집중해야만 할 것이다.


‘democracy’체제 안에서 어떠한 가치가 이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지려면 ‘다수’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올바른 정의를 바탕으로 올바른 가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정의와 가치가 ‘다수’의 정의여야만 하고, ‘다수’가 동의하는 가치여야만 한다. 물론 ‘다수’의 가치가 반드시 ‘선’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만약 잘못된 결과를 초래한다면 새로운 가치에 ‘새로운 다수’가 뜻을 모아 새롭게 등장하면 되는 것이다. ‘democracy’는 그런 거니까 말이다. 역사적으로 모든 ‘권력자’들이 그랬듯 ‘소수의 특권층’은 소수의 세력이 지배력을 독점하려고 한다. 소위 ‘민주주의’ 체재라는 현재의 대한민국도 ‘소수 특권층’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다수’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하고 있다. 소수만 중요 정보를 공유하고, 소수만 높은 가치의 자원을 독점하며, 소수만을 위한 법과 제도를 유지하는 등의 노력으로 ‘다수 지배’가 아닌 ‘소수 지배’를 추구해 왔으며 지금도 그러한 행태를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한 ‘소수 특권층’은 원리적으로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최대의 적이다. ‘다수 지배’를 못하게 하거나 거부하면서 ‘소수 지배’만을 추구하니까 말이다. ‘소수의 특권층’은 너무도 자명한 ‘민주주의의 적’이다. 너무나 자명해서 눈에 잘 띄기 때문에 ‘적을 타도’함에 있어서 목표로 삼기 딱 좋다. 워낙 많은 권력을 독점하고 있기에 대적하기 힘들고 무섭긴 해도 소수라서 싸움을 할 때 화력을 집중하기 용이한 것이다. 실제로 ‘독재 세력’이 다수의 집중된 저항으로 하나씩 무너져버린 뒤 ‘다수’에게 그 권한이 조금씩 넘어오는 과정이 바로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적’은 그러한 ‘소수의 특권층’만은 아닌 듯하다. 눈에 띄지 않아서 목표로 삼기 힘들고, 그렇기에 힘이 분산되어 싸움에서 화력을 집중하기도 어려운 ‘적’이 또 하나 있다. 그 적은 바로 ‘공동체’ 즉 ‘다수’에 대한 공격을 통해서 개인의 가치와 존재의의를 높이는 것에만 모든 관심이 집중된 자들이다.



이들은 ‘다수’라면 일단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들의 비판은 ‘다수 지배’가 성공할 수 있도록 ‘다수의 가치’가 ‘선’에 가까워지게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존재가 순수하고 고매한 상태로 홀로 완벽하게 자립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그런 목적의 비판만을 일삼는다. 추구하는 공공의 가치 따위는 없다고 감히 단언한다. ‘다수’를 공격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무구하고 순수한 즉자적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그런 자들이 우리 사회에 분명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의 행동이 ‘다수 지배’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원리적으로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이와 같이 순수주의에 빠진 ‘개인’은 한 가지 신기한 공통점이 있다. ‘다수’에 대한 공격에만 주로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소수의 독재’에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는다. 그러다가 ‘소수 지배’에서 ‘다수 지배’로 ‘민주주의’가 실현되려고만 하면 어딘가에서 튀어나와 ‘다수’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내가 그 이유를 예상해 보자면 아마 ‘소수의 독재’를 비판하는 것을 통해서는 ‘싸우는 다수’ 가운데 흔한 하나가 되기에 관심이 없는 것이고, ‘다수’를 비판하게 되면 자신이 ‘특별하고 순수한 개인’이 될 수 있기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참으로 그 이기심에 분노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대부분 이런 자들의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개인주의’처럼 보이기 때문에 진영이 형성될 때면 주로 ‘진보’로 분류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런 자들은 자신이 ‘진보’로 분류되는 것에 즉각적인 불쾌감을 보이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보수’로 분류되는 것도 거부한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 이들은 진보도 보수도 아닌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중도’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개인주의’처럼 보이는 것들에는 우리 사회가 기본적으로 ‘진보’라는 타이틀을 달아주기 때문에 이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내부고발’의 느낌을 주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진보 진영을 무너뜨리고 보수 쪽 진영을 도와주는 꼴이 되는 것이 참 심각한 일이다.


‘조국 흑서’를 읽어보진 않았지만, 조국 흑서 집필진들의 면면을 살펴보자면 소위 ‘범진보’로 분류되어 활동했던 자들이 주를 이룬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이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스스로를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지적으로 성숙된 단독자라고 자부하며 자신의 위치를 ‘진보’보다는 ‘중도’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범진보’ 명찰을 가지고 있었던 적이 있기 때문에 이들은 지금 마치 ‘내부 고발자’인양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불의를 참지 못해 분연히 일어선 의인 역할 놀이에 몰입하고 그걸 즐기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은 어떤 ‘다수’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걸까? 즉 어떤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걸까? 스스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정의’, ‘공정’, ‘원칙’, ‘법’ 등의 가치를 위해서 행동하고 있는 걸까? 사람의 마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이라 솔직히 그들의 동기와 목적을 그저 짐작해 보는 정도일 뿐 정확히 알 방도는 없지만 이들이 승리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 조금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은 현 상황에서 ‘보수’진영에게 응원을 받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수’ 진영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즉, ‘보수’ 진영의 승리를 바라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당연히 ‘진보’진영을 비난하고 있으니 ‘진보’진영의 승리를 바라는 것도 분명 아니다. 그럼 뭘까? 이들이 승리를 한다면 오롯이 이들 자신만의 승리가 아닐까? 그리고 그로 인해 증명되는 것은 어떤 ‘다수’의 가치가 아닌 자기 자신들의 순진무구함뿐이 아닐까? 그래서 이들의 행위는 개인의 순수함, 순결함, 고결함,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수’의 가치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과 원리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이기심은 그래서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불러야만 하는 것 아닐까?

3.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망설이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지성인이다.

이 세상에는 ‘할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이 있다. 아마 여러 철학자들이 정립해 놓은 훌륭한 정의가 있을 것이 분명하지만 나는 공부가 부족해서 학문적인 개념은 잘 모르니까 조금 세속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지구 환경을 파괴하기만 하는 인간은 지금 당장 없어져야만 한다.’와 같은 말이 바로 ‘할 수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런데 너는 왜 아직까지 살아 있느냐? 왜 지금 당장 죽지 않느냐?’와 같은 물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할 수 없는 말’의 예는 무궁무진하다. ‘인간도 동물일 뿐인데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강자가 약자를 죽이는 것을 왜 법으로 금지하면서 못하게 하느냐?’라는 식의 ‘중2병 같은 질문’도 전형적인 ‘할 수 없는 말’이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누군가 다가와 머리에 권총을 들이밀면서 ‘방금 했던 말을 똑같이 다시 말해 볼 수 있겠느냐? 내가 너를 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말해봐라.’와 같이 묻는다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할 수 없는 말’의 존재 유무가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모순덩어리’라서 분명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되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그 말들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주목할 점이다. 예를 들어 ‘부동산 투기가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도 기회가 생기면 강남에 집을 사는 선택을 한다.’던가 ‘특목고의 폐지가 교육문제 해결을 위한 1번 과제라고 하는 사람도 자기 자녀는 특목고에 입학시키고 싶어 한다’는 식의 ‘표리부동’말이다. 굉장히 세속적인 사례를 두 가지만 적어보았을 뿐 이런 식의 ‘인간의 이중성’은 아주 일상적으로 매일 벌어지는 것에서부터 심각한 수준의 것까지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인간은 모순된 일그러진 존재이다.’라는 지점에서 끝내선 안 된다. ‘할 수 없는 말’이 있고, 인간은 그런 말들을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매일 매일 사용하는 ‘모순’된 존재이지만 그러한 자기 자신을 성찰하면서 인간은 자신이 ‘일그러져 있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 부끄러움은 인간이 겸손한 태도를 갖게 만들고, 잠시 ‘망설이게’ 만드는 마음의 걸림돌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태도’야 말로 지성인의 자세이다. '머뭇거리는 그 순간' 인간은 변화할 수 있다. 진보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을 하는 순간이 아니라 내가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면서 '머뭇거리는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절대적으로 옳은 말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그 말을 자신이 하고 있다고 할 때 그 순간조차도 ‘모순된’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겸손함을 바탕에 두어야만 진정 ‘이성적’인 것이 아닐까? 이 책의 제목 ‘과학의 품격’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시작된 쎄한 느낌은 첫 번째 파트인 ‘황우석 줄기세포 조작’사건을 파헤친 일화를 읽을 때까지 해소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아마 그러한 불쾌한 느낌의 원인은 ‘품격’이라는 단어와 ‘정의의 사도’로서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책의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은 외롭더라도 늘 옳은 길만을 걸어왔고 항상 진실만을 추구해 왔다는 듯 하는 태도에서는 ‘자기 성찰’이나 ‘망설임’, ‘시대정신’의 흔적보다는 ‘순수주의’, ‘이기주의’, ‘선민의식’, ‘자만심’, 자기우월주의‘만을 발견하게 되니까 말이다.

정리해 보자면,


나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서 지적으로 게으르고 이기심과 허영심에 빠졌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자기우월주의’,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이야기하고 있는 ‘과학 에세이’를 나는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같은 사실이 있더라도 ‘누가’ 이야기하는지에 따라서 ‘진실’이 될 수도 있고, ‘공허한 외침’이 될 수도 있다. 나에게는 이 책이 후자로 다가왔다. 그래서 책의 2부에 있는 다양한 주제의 ‘과학 에세이’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2부를 장식하고 있는 흥미로운 주제의 과학 에세이들을 만나 때마다, 여지없이 ‘공허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이 책에 소개된 에세이들의 모든 주제와 에세이에 담긴 모든 문제제기들에 대해서 나는 비판적 반대 의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의 제목을 패러디 하자면 ‘글의 품격 없음’에 대한 본능적, 감정적 거부감이라고 할까? 글도 품격이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품격은 바로 작가 혹은 화자의 품격을 통해서만 탄생할 수 있다. 아무리 고상하고 수사적으로 완벽한 문장을 논리적인 구조로 만들어낸다 한들 그것을 ‘만든 이’가 천박하다면, 그의 손으로 빚어낸 ‘작품’도 그저 그런 수준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


‘시견유시불견유불(豕見唯豕 佛見唯佛)’이라는 옛 말이 있다. 비난이란 잔인하게도 결국 나를 향해 돌아온다. 내가 이 책을 쓴 작가를 ‘품격이 없다.’, ‘지적으로 게으르다.’, ‘이기심과 허영심에 빠져 있다.’ 등등의 원색적인 말로 비난하는 순간(이미 했다.) 사실은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분명 ‘수치심’이 있다. 이번 기회로 나를 한번 다시 돌아보고, 나에게도 있을지 모르는 ‘천박함’, ‘게으름’, ‘지적허영심’ 등을 똑바로 마주보고 조금이나마 ‘모순되고 일그러진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4. 그렇다면 아무리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같은 편은 비판하지 않고 그저 감싸주어야만 하는 걸까? 그리고 성인군자만 타인을 비판할 자격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위선자라는 것인가?

나는 갑자기 유시민 작가가 떠올랐다. ‘조국 사태’가 발생하여 모든 언론이 검찰과 한 몸이 되어 ‘조국을 비난하는 기사’만을 쏟아내고,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의 순수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자들이 하나 둘 튀어나와 ‘조국을 비롯한 진보진영’을 욕하기 바빴던 그 때, 혜성같이 등장하여 ‘조국의 편’에 선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유시민’이었다. 유시민은 이른바 ‘조국 대전’ 혹은 ‘검찰 쿠데타’에 참전하면서 가장 먼저 자신이 조국 대전에 ‘참전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참 멋지다’, ‘나도 유시민처럼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삶을 ‘유시민’처럼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은 ‘유시민’이 ‘조국 편’에 섰기 때문이라거나 ‘유시민’이 절대적으로 옳은 말만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유시민’처럼 살아가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연대의식’과 ‘책임의식’ 때문이다.


정확한 발언 내용을 다시 찾아보는 수고를 하지 않고 그냥 기억나는 걸 적어보자면 유시민은 ‘참전 이유’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언론에 나오는 사실들에 대해서 다양한 경로로 펙트 체크를 해 본 결과,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에 조국대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내가 잘못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책임감을 느끼고 조국과 함께 휩쓸려 떠내려 갈 것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식의 ‘연대의식’과 ‘책임의식’이 깃들어 있는 말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중요한 몇몇 사건들이 발생했을 때마다 ‘나의 동지가 잘못된 판단으로 비난받는 행동을 했다면 나도 그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함께 돌을 맞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같이 책임지는 선택을 하였던 사람이다.

어른 없는 사회.

아무도 책임지려고 나서지 않는 사회가 되어가면서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는 요즘, 유시민의 저 발언은 내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다. 유시민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기 자존심을 세우면서도 인기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사실 저렇게 행동해서는 안됐다. 이미 수많은 소위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취하는 정답이 있지 않은가? ‘양쪽을 모두 근엄하게 꾸짖기’ 같은 점잖은 선택 말이다. 그런데 유시민은 그러지 않았다. 자기 혼자만 승리하는, 오로지 자신의 무구함과 순진함만을 위하는 행동이 아니라 자신이 지지하는 ‘가치’를 함께 실현시켜나갈 ‘공동체’와 함께 하겠다는 ‘연대’를 택했다. 그러한 ‘연대’에는 반드시 무겁고도 무서운 ‘책임’이 뒤따르는데도 말이다.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책임져 본 일 하나 없어 상처 따윈 없는 고고한 상태의 순수함이 아니라 책임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쓰러지고 짓밟혀 상처투성이가 되더라도 추구하는 가치의 실현을 함께 이뤄나갈 ‘공동체’의 손을 잡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공동체 내부에서 문제점 개선을 위한 '비판'을 하면서도 공동체의 잘못에 대해서는 함께 책임을 지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저 미숙한 존재처럼 필요할 때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안락함을 누리다가 뭔가 책임질 일이 있으면 그 공동체에서 빠져나와 '비난하기'에 목소리를 높이면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이기주의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뭐라 말하기 참 어려운 문제이다. ..........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과학 서적’을 보고 그저 제목에 있는 ‘품격’이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정치적인 언설들로 ‘서평’을 가득 채우고 마지막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다소 의미없는(?) 말들까지 하게 되었다. 참... 책을 읽는 것도 쉽지가 않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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