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지선생 [교육교육열매:초인계]

[TOB in 인문]전라남도교육연수원 주최 초등 성장기 생애 단계별 직무연수:'내가 강사라니...'진지샘의 첫 강사 체험담'-삶 속에 배움이 있는 교육 수업 사례 발표를 마치고


생애 처음으로 강사로서 우리 반 아이들이 아닌 교사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게 되었다. 전남교육연수원에서 주최한 교사 생애주기별 연수였다. 이 연수는 성장기, 발전기, 완숙기로 경력에 따라 교사 생애주기를 3가지로 나눠서 진행되었는데 나는 그 중에서 성장기 연수 프로그램 30차시 중 1차시 강의를 맡게 되었다.


솔직히 내가 강의라는 것을 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일단 당연하게도 별다른 능력이 없는 나에게 강의를 요청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 당연하거니와 만약에 누군가 나에게 강의를 요청하는 일이 있었더라도 내가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남들 앞에서 강의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단순하다. 나 스스로는 ‘지적 양심’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유 때문이다. 이것이 남들에게는 ‘지적 허영’이랄지 아니면 ‘허세’라고 불릴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과 그 생각에 따른 행위들은 모두 내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해서 스승이 있다. 예를 들어 ‘비고츠키 철학’과 ‘일리론’은 우치다 타츠루와 박동섭 교수님으로부터, ‘발도르프 교육철학’과 ‘인지학’은 루돌프 슈타이너와 장승규 선생님, 무등자유발도르프 선생님들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와 관계했던 수많은 동료, 선배님들에게 전해 받은 모든 것들이 내 안에 자리 잡아 내 생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지금까지 했던 일들에 대해 베타적인 소유권을 가진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은 못할 짓이라고 생각해 왔다. 다른 분야들은 전문 영역이 아니라 잘 모르기 때문에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내가 속한 교육 분야에서는 너무나 쉽게 스승에게 전해 받은 것을 마치 자기 고유의 것인 양 마케팅 하는 사람들, 심지어 다른 사람 것을 그냥 가지고 와서 자기가 만들었다고 하는 사람들을 엄청나게 많이 찾을 수 있다. 평소 그런 사람들을 도덕적이지 않다고 ‘마음 속’으로 비난해 왔던 나이기에 내 스스로 내가 비난해 왔던 일을 내 이기심의 충족을 위해 아무렇지 않은 듯이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단, ‘모두 까기’를 했던 것은 아니다. 교육 분야는 인간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추구해야 하는 첫 번째 과제이다. 인간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 카테고리에서 나오는 이야기들 중 수업방법이나 수업기술은 아이디어 차원으로만 제시되어 머물러서는 안 되고, 실제 아이들과 실천한 결과로써의 사례와 피드백이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 그래서 똑같은 아이디어라고 하더라도 각기 다른 현장에서 수많은 선생님이 수많은 아이들에게 적용해 본 사례가 공유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자신이 실천한 사례와 피드백을 공유해 주는 사람들로 인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인간의 발달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이런 고마운 존재들에게는 늘 감사함과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지만, 내가 도덕적이지 않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실천결과나 스승에게 전해 받은 내용에 대해 독점적 권리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명예를 높이거나 경제적 이득만을 취하려는 자들이다. 정말...정말 쉽게 찾을 수 있어서 늘 놀랍다.


다시 돌아와서 그렇다고 양심적인 척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스승’의 존재를 밝히는 것이 손쉬운 해결책이 되어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문제가 더 복잡하고 심각해진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모든 이야기는 스승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순간 ‘담보’문제와 ‘책임’문제가 발생한다. 먼저 담보 문제란 쉽게 말해서 자신이 이해한 스승의 가르침과 그에 따른 자신의 실천이 스승이 전해주려고 했던 소위 ‘오리지널’과 같은 것이라고 과연 담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제가 지금부터 하려는 말은 모두 스승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때부터 사람들은 나의 이야기를 스승의 이야기와 동일시해서 이해하기 시작한다. 내가 스승의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였거나 곡해하여 말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큰 의심을 품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내가 스승에게 전해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스승이 나에게 전해주려고 했던 것과 같다고 담보할 수 있는 걸까? 누구의 말로 담보하면 높은 신뢰성이 생기는 걸까? 높은 신뢰도를 가지고 담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한 걸까? 한편 참 얄궂게도 스승의 가르침과 나의 이야기가 일치한다는 담보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뭔가 책임져야 할 상황이 오면 그 때부터는 나의 수준에서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을 내가 온전히 책임지지 못하는 상황으로 뭔가 손 쓸 틈도 없이 흘러가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가지는 곳이 아니다. 각자가 일정 정도의 책임과 의무를 공유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독립 객체의 완전한 자립이란 있을 수 없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동시에 요청받은 책임을 기꺼이 대신 져야 하는 불가피함이 있다.


하지만 인간이 상보적 존재라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의 괴로움, 미안함 등에 둔감해도 된다는 의미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한 이야기로 인해 뭔가 책임져야 할 일이 있을 때 ‘내가 책임지겠습니다.’로 사태가 해결되지 않고, 아무 잘못이 없는 스승에게까지 비난의 화살이 향하게 될 때의 미안함과 수치심은 보통 일이 아니다. 겸손의 표현임과 동시에 양심적 고백이었던 ‘나의 이야기는 스승에게서 비롯된 것이다.’라는 말이 의도와는 달리 책임전가 또는 책임회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나의 말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짊어지려고 주인 행세를 하게 되면 남의 생각을 도둑질하는 ‘도덕적 해이’가 되고, 사실대로 내 생각이 스승에게서 전해 받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면 ‘책임전가 또는 책임회피’가 되어버리는 사면초가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 바로 ‘남들 앞에서 강의를 한다는 것’의 어려움이다.


이러한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스승에게 전해 받은 것이 나의 삶이 되도록 충분히 살아 나가는 것이다. 즉 배움이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내 이야기로, 내 삶으로 배운 것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때가 되면 바로 그 때가 되어야 비로소 자신 있게 주인 행세를 하면서 당당히 무게감 있는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이제 결론이다. 남들 앞에서 가르치는 자로 나서기 위해 했어야 할 ‘스승의 가르침을 내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나는 아직 해 내지 못했다. 즉, 내 삶으로 강의를 할 수 있는 수준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내가 강의에 나서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내가 강사로서 우리 반 아이들이 아닌 교사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게 되었다. 단지 50분! 1차시지만 말이다. 아직 강사로 나설 수 없는 상태인 것은 변함이 없는데도 강의를 했다. 살짝 다른 상황이 찾아왔기에 그렇게 되었다. 어느 날 스승님께서 ‘사례발표’를 해 보라고 먼저 권해 주신 것이다. 스승님의 말씀으로 인해 강의를 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도둑질해서 나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려는 ‘도덕적 해이’가 아니라, 배움을 전해 받은 자가 계속 그러한 배움이 공동체 안에서 이어지도록 다음 전달자의 역할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도덕적 책무’가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처음으로 나의 교육실천 결과를 ‘사례발표’라는 이름으로 전하는 자리에 가게 되었다.


나의 강의는 2019학년도에 1년 동안 진행되었던 ‘1학년 한글 지도’사례를 발표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소개만 하면 된다고 쉽게 생각했는데, 막상 수업의 결과를 언어로 구체화시키고 그것들을 하나의 논리적 흐름으로 엮으려고 하니까 생각보다 막히는 부분이 많이 생겼다. 발도르프학교의 철학인 인지학에 기반한 한글 지도는 단지 한글의 해득-미해득에만 과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한글의 해득도 중요한 목표이긴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모국어인 한글이 아동의 발달에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를 고민하여 언어의 음악성, 회화성, 조형성을 느끼게 하는데 그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수업 과정 속에서 소리를 통한 음악적 아름다움과 글자의 모양에 따른 회화적-조형적 아름다움을 아이들 마음속에 어떤 방법으로 불러일으키는지에 대해 50분 동안 모든 한글 자음자와 모음자 사례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자음자 하나의 사례에 집중하고자 하였다. 자음자 하나에 대한 수업이라고 해도 무려 3차시의 수업을 이야기해야하기 때문에 50분의 강의만으로는 빠듯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자음자 하나의 수업사례를 자세히 안내함으로써 인지학에 따른 한글 수업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드러내는 한편, 그 중요한 것을 어떤 과정을 통해 아이들에게 온전히 전하려고 했는지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하나의 자음자 지도방법에 집중하는 것을 통해 내 의도가 성공적으로 달성이 된다면 시간관계상 소개할 수 없었던 나머지 자음자와 모음자 지도방법은 강의 마지막에 수업 활동결과인 아이들의 한글공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나열하는 것으로 대신하더라도 강의를 듣는 선생님들의 마음속에 긍정적인 느낌과 즐거운 상상을 불러일으킬 거라는 희망적인 기대도 했다.


1시에 시작된 강의는 긴장감 때문인지 순식간에 흘러갔다. 정리해 간 원고를 강사로서 앞에 선채로 보니 갑자기 ‘하얀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글씨로다.’가 되어버려서 원래 계획했던 흐름과는 달리 그냥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하느라 그렇게 느껴진 것 같다. 나중에 알아차린 것이지만 그러다보니 꼭 말하고 싶었던 것들을 말하지 못한 채 넘겨버리기도 했다. 아쉬운 점은 많았지만 나의 강의는 ‘사례발표’였기 때문에 그래도 내 역할에는 어느 정도 충실했다고 스스로는 토닥이면서 강의를 마무리 하려는 순간 한 가지 소소한 사건이 발생했다.


일단 이 사건은 내가 생각하기에 그 원인이 나의 사례발표 전 타임이었던 오전 3시간동안 진행된 장승규 선생님의 ‘아동의 성장과 발달을 위한 삶과 교육’이라는 강의에서부터 비롯됐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왜냐하면 장승규 선생님의 강의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는 장승규 선생님에게 오늘 들려주신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벌써 3번 이상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새롭고 감동적이었다. ‘삶과 교육’이라는 주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먼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정말 내밀하면서도 구체성이 잘 드러나게 이야기 해 주셨다. 삶에 대한 물음은 자연스럽게 인간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차분하지만 큰 울림이 있는 통찰로 인지학에서 인간을 어떤 존재로 그려내는지에 대해 말씀해주시고 교육의 과제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강조하시면서 그렇게 강의는 마무리 되었다. 장승규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아마 연수에 참여한 선생님들의 마음속에 어떤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가 꿈틀거리게 됐을 것이다. 내가 감정이입을 통해 상상해 보자면 그랬을 것 같다. 일단 어마어마한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는 경외감. 당장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엄청난 것이 분명하다는 감각이 마음속에서 솟구쳤을 것이다. 그러면서 곧바로 더 자세히 알고 싶고, 빨리 이해해 버리고 싶은 욕망이랄까 뭐 그런 복잡한 감정들이 이어졌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던져지면 사람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행동하려 한다. 경외감을 간직한 채로 내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거대한 지(知)에 끈기 있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거대한 지(知)에 압도되어 내 자신이 초라해 지는 불안감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이미 알고 있는 것들로 새롭게 등장한 지(知)를 손쉽게 치환하여 작게 만들어 버리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의 성숙도와는 별개로 새롭게 맞닥뜨린 세계의 크기가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미지의 세계를 괄호로 묶고 그 모호함을 견뎌내는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지(知)를 하찮은 것으로 바꿔 내 세계에 억지로 구겨 넣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장승규 선생님의 강의에서 거대한 무언가를 만나게 된 사람들 중 몇 명이 첫 번째가 아닌 두 번째 선택을 했을 것이고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사건의 주인공이다. 다시 강의로 돌아와서 소소한 사건은 강의가 마무리 된 후 질의응답 시간에 발생했다. 나는 주어진 시간인 50분 동안 강의를 진행했고 정확히 시간을 지켜서 마무리하였다. 원래는 질의응답시간을 5분 ~ 10분정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강의 안내에 있었지만, 어제 있었던 5시간의 강의와 오늘 오전에 있었던 3시간의 강의에서 질문이 거의 나오지 않았던 것을 참고하여 그냥 질의응답 시간까지 강의를 진행하고 딱 끝마친 것이다. 그런데 앞선 강의들과는 달리 질문이 여러 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 질문들 중에서 어떤 한 선생님의 꽤나 긴 질문이 바로 소소한 사건이다.


아니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분노라고 불러도 좋은 것이었다. 그 선생님은 사례 발표를 마친 나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궁금한 것의 답을 구하는 질문이라기보다는 격한 감정을 일방적으로 드러내었다. 너무 말이 길었고, 내가 기록을 하면서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요약하자면...

“발도르프 철학에 따른 수업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음악과 미술 등을 활용한 수업으로 아이들에게 성공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 발도르프교육이라고 앞선 오전 강의에서 배웠는데 지금 선생님께서 소개해주신 수업 사례는 이미 시중에 많이 유통되고 있는 여타의 한글 교재들보다도 효율성이 많이 떨어진다고 판단됩니다. 또한 이미 수많은 학교 현장에서 음악 교과와 미술 교과를 다른 교과와 재구성을 하거나 융합한 수업들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것들에 비해 발도르프수업이라는 것이 뭐가 더 특별한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솔직히 오히려 기존의 재구성 수업들보다도 뒤떨어지는 수업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입력

라고 할 수 있다. 너무 길어서 모든 문장을 다 기억해 내지는 못했지만 핵심은 정확히 저런 말이었다. 분노를 쏟아내는 선생님의 모습에 정작 질문을 받고 있는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오히려 몇몇 지켜보는 선생님들이 더 당혹스러워 하시기까지 했다. 질문이 맞긴 했던 건지 아니면 발도르프교육에 대한 큰 기대에 비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나의 수업사례가 불러일으킨 자신의 실망감을 표출하는 것이 목적이었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다음 강의 스케줄이 임박했기에 황급히 연수 진행자께서 내 강의를 마무리해 주셨기 때문이다. 연수 진행자의 판단은 베스트였다. 그리고 내 스스로도 사례발표자로서의 역할은 딱 여기까지가 적당하다고 생각하였다. 다만... 아쉬움이 큰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목 넘김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목에 탁하고 걸린 채로 그냥 넘길 수 없는 말들이 가득했다. 너무 아쉽기 때문에 지금 쓰고 있는 강의 후기에서라도 가볍게 언급하고 마무리해야겠다. 나를 향한 분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해 드리고 싶었다. 일단 발도르프 교육에 대해서 내린 결론부터 되돌아봐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지학과 발도르프교육을 ‘예술 교육을 통한 성공 경험 제공’이라는 말로 요약해서는 곤란합니다. 성급함이 문제가 아닙니다. 방향성이 문제입니다. 아직 인지학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꾸러미가 충분하지 않다면 잠시 ‘정의 내리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이 어떨까요. 왜냐하면 효율성과 특별함(비교우위) 같이 발도르프교육이 추구하지 않는 단어들로 발도르프교육을 규정짓는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효율성. 그런데 효율성이 과연 인간과 어울리는 가치인지 먼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효율성이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우리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인지학에 기반한 한글 교육의 목표는 효율성 높은 방법으로 문자 해득을 최단시간에 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4학년 국어 ‘위대한 한글’ 단원에 다음과 같은 차시가 있습니다. 학교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가게들의 간판들을 조사한 뒤 한글로 된 간판과 외국어로 된 간판을 분류한 다음 외국어로 된 간판을 한글 간판으로 바꿔보는 활동을 하는 수업입니다. 외국어로 된 간판이 많다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에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학생, 아름다움이 풍기는 한글을 상상해 내지 못하는 학생, 외국어가 한글보다 더 멋지고 세련되었다고 생각하는 학생, 수업활동이 아닌 현실에서는 외국어 간판을 선호하는 학생, 외국어 간판을 한글 간판으로 바꾸는 것을 거부하는 학생 등등. 이 차시의 수업이 목표로 하는 방향으로 즐겁게 함께 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적 우수성, 세종대왕의 애민정신 등을 자세히 설명해 주면 되는 걸까요? 한글을 사랑하는 태도는 언제, 어떻게 우리의 마음속에 생기게 되는 걸까요? 최소한 한글 해득만을 효율적으로 추구하는 국어수업으로는 불가능 하지 않을까요? 한글을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진단한 다음, 효율적인 방법을 통해 최대한 빨리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수업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담아낼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한글을 사랑하는 마음과 한글의 아름다움을 아는 것은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 걸까? 모국어를 온전히 사용하는 것은 인간이 되어져 가는데 어떤 역할을 할까? 언어를 온전히 사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래서 언어는 인간에게 무엇일까? 등등. 인지학에 기반한 저학년 한글 지도 수업은 특별한 기법으로 한글 해득을 효율적으로 달성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위와 같은 질문들에 교사로서 진지하게 답해 나가고자 하는 과정이라 강조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혹여, 교육의 장면 속에서 위와 같은 질문들에 굳이 답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감이 생겼다면 먼저 자신의 삶을 떠올려 보고 인간과 삶, 교육에 대해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봐야 할 것입니다. 일단 저부터 하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시간이 여기까지라고 한계를 지어주었다. 너무 아쉽고 또 아쉬운 일이다. 대답을 못해 버린 것으로 인해 왠지 많은 사람들에게 누를 끼친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연수는 이미 끝나버렸는걸... 아쉬움에 잠들지 못할뻔 했던 나에게 인지학 공부도 같이 하고, 이번 연수에도 함께한 마음 따뜻한 한 선생님이 다음과 같은 시를 '선물'해 주셨다. 시를 통해 아쉬움이 많이 달래진다. 역시 배려왕이신 선생님이다.!!!


p.s 이렇게 나의 생애첫 강의는 마무리 되었다. 멋진 경험이었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어서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