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지선생 [교육교육열매:초인계]

[TOB in 인지학]광주효동초등학교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앎 두번째 시간: '부모 교육'이라는 과제와 부모교육의 필요성 그리고 부모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 노력할 점은 무엇일까?

2020년 9월 29일 광주효동초등학교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앎 2회

광주효동초등학교에서 열린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앎 강독회(2020.09.29.)에서 ‘스승님’께서는 ‘부모교육’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음을 이야기하셨다. 어린이들이 가정에서 부모에 의해 인지학적인 관점에서 이미 그르친 것들을 “교사”들이 자신들의 과업으로서 교정해야만 하는 현시대에, 여러 교육의 과제와 더불어 ‘부모에 대한 교육’도 반드시 같이 이루어져야만 교육의 의미가 더욱 살아날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연스럽게 마음이 무거워진다.

1. 학부모 교육이라는 과제

부모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에서 관용적으로 쓰이고는 있지만 실제와는 맞지 않는 말이 하나 있다. ‘요즘에는 자식을 한, 두 명밖에 낳지 않아서 자식을 끔찍하게 여긴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과연 그럴까? 정말로 요즘에는 자기 자식에게 모든 관심이 쏠려있을까? 아니 굳이 오늘날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아이’라는 존재가 소중하게 여겨진 적이 인류 역사에 존재한 적은 있었을까?



우리가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의 지표 중 가장 강력한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의 투자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떠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져 있는 하루 24시간의 시간을 어떤 비율로 배분해서 사용하느냐가 그 사람이 어떤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느냐, 즉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느냐를 판단할 수 있는 핵심적인 증거가 된다. 물론 그것이 시스템에 의해 강제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신념에 의한 것인지에 따라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지긴 하지만 말이다. 요즘 학부모들이 정말로 ‘한, 두 명밖에 없는 자신의 아이’를 끔찍하게 여기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들이 ‘자식 교육’에 할애하는 시간을 살펴보면 판단을 내리는데 필요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아이의 하루 시간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것이 다름 아닌 ‘교육받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교육’의 품 안에서 보호받으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아이를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내 아이에 대해 정말로 관심이 많다면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여야만 하는 것은 당연하고 실제적으로도 ‘자식을 끔찍하게 아끼는 부모’라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교육의 장’에서 자신의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많아야만 한다. 과연 요즘 부모들은 관용적 표현처럼 자녀의 ‘교육 문제’에 ‘자기 시간’을 상당히 많이 할애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부모들이 뭐라고 대답할지를 상상해 보았다. 그러다가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다. 왜냐하면 ‘부모교육’이라는 것이 녹녹치 않을 거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부모교육이 이루어지려면 우선 부모들이 ‘자식 교육’에 자신의 시간을 할애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학교에 직접 참석해야 하는 행사가 부담스럽다면 최소한 담임 선생님이 보내는 소식지를 읽어보는 일 정도는 성심껏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자식교육과 관련하여 부모로서 기꺼이 해야만 하는 일을, 소요되는 시간의 길고 짧음과는 관계없이,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행위가 필요한 때에 그 일에 대한 부모의 직접적이고도 실제적인 시간 투자가 진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떨까? 현실은 처참하다. 학교에서는 학부모가 1~2시간 정도 직접 참석해야만 하는 일에는 당연히 학부모가 참석할 것을 기대하지 않게 된 게 이미 오래 전 일이고, 심지어 꽤 많은 수의 학부모가 학교에서 보내는 간단한 안내장조차 확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랍다거나 답답한 일이 아니라 당연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게 되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두어야 할 점은 학부모 연수나 학부모 모임 시작 시간의 영향은 별로 크지 않다는 사실이다. 학부모 참석 연수를 10시에 하든, 14시에 하든, 아니면 저녁 19시에 하든 전체 참석 인원수는 큰 차이가 없다. 단지 참석하는 사람만 바뀔 뿐이다. 10시에 시작하면 직장에 다니는 학부모들은 당연히(?) 참석하지 못하니까 직장에 다니지 않는 학부모 중 일부가 참석하게 되고, 19시에 시작하면 직장에 다니는 학부모들 중 극히 일부의 참석 가능성이 올라가긴 하지만 10시에는 참석 가능했던 학부모들 중 상당수는 어려가지 이유로 참석하지 못하게 되는 식이다.


현재 학부모라는 존재에 대한 학교의 인식이 위와 같은 것에서 알 수 있듯 우리 사회의 학부모들은 ‘시간을 할애하는 비율’만 놓고 보면 ‘교육’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단지 온갖 종류의 경쟁과 그에 따른 결과에만 관심이 있을 뿐, 부모들이 말하는 교육에 대한 관심이란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성과가 나오기만을 요행으로 바라는 것’이 그 본질이라고 해도 별로 틀리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부모들이 자식을 끔찍하게 여긴다. 아낀다. 사랑한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학부모들은 ‘교육’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의 수준을 넘어서 자녀의 교육 문제가 자기 삶의 영역으로 조금이라도 발을 들여놓으려고 하면 그것을 ‘자기 영역에 대한 무단 침입’ 내지는 ‘자신에 대한 무례한 도전’이라고 여기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자식이 일으킨 문제 해결에 필요한 부모로서의 협조를 요청하려고 연락한 교사에 대하여 공격적이고 무례하게 반응하는 것이 ‘표준 매뉴얼’이라도 되는 듯 ‘소리치기, 욕하기, 화내기, 책임 떠넘기기, 책임 회피하기, 잡아떼기, 상급기관에 민원 넣기, 고발하기, 모함하기, 양비론 및 쌍방과실 주장하기, 과거의 일 모두 들춰서 꼬투리 잡기’ 등의 방식으로 대처하는 학부모가 이제는 특별히 유별나 보이지 않게 된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는 문제 상황 때문이 아니라 자녀의 교육과 관련된 학교생활에 대한 여러 가지 일상적 정보들을 공유하고 관심 내지는 지원을 부탁하려는 교사의 연락마저도 그저 학교의 연락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발작적’인 불쾌감과 거부감을 드러내는 학부모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여기서 기가 막힌 점은 우리 사회와 학부모들은 이런 상황 역시 ‘학교와 교사’가 문제의 원흉이라고 힐난한다는 것이다. 교육에 있어서 모든 원인은 학교와 교사에 있고, 학부모와 학생은 ‘무구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른바 ‘상식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도 하나의 서비스일 뿐이고 학부모와 학생은 완벽한 소비자라고 말하는 것에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현시대의 정신에 비춰보았을 때 ‘소비자라는 존재’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다. ‘순수한 소비자’인 학부모와 학생들은 다양한 종류의 비난들로 모든 책임을 학교에 떠넘기고 있다. 예를 들어 성적이 좋은 아이들은 이미 얻을 것을 다 얻었다는 이유로, 성적이 좋지 않은 아이들은 어차피 얻을 것이 없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교육’과 관련된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치명적인 손해라고 말한다. 학교는 바로 그 치명적인 손해를 강제시켰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실패의 원인은 모두 ‘학교와 교사’ 탓이 된다. 또 다른 예도 있다. 자신들의 가치관으로는 아이가 초등학교 2, 3학년 정도가 되었을 때부터는 아이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기는 것이 교육적으로 좋은 것인데, 자꾸 능력도 없는 교사들이 교육서비스 제공자인 자신들의 할 일을 수요자인 부모에게 떠넘기기나 하고 아이의 교육(성적)에는 부정적인 영향만을 준다며 출처 불명의 신념에 근거한 비난도 이루어진다. 모든 책임을 학교로 돌려버리는 비난은 이밖에도 종류가 상당하다.


이런 식으로 사회와 학부모는 ‘교육소비자는 이미 충분한 대가를 지불했으니 학부모가 최상의 결과물을 편안하게 받아볼 권리를 향유 할 수 있도록 학교와 교사가 돈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소비자가 만족하지 못하면 소비자의 지속적인 선택을 받지 못할 테니까)으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데 자꾸만 학부모에게 손을 내밀거나 책임을 떠넘긴다.’라고 생각하며 불쾌감을 마구 표출하지만 반대로 학교와 교사는 ‘교육에 관심이 없는 학부모들’ 때문에 심각한 어려움을 호소하는 형편인 것이다. 이런 식의 책임 미루기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처럼 한쪽이 비난하기와 책임 회피하기를 그만 두지 않는 한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은 과학적으로는 이미 결판이 난 주제이다. 답은 ‘닭이 먼저다.’이다. 진화의 과정 중 어느 순간 우연한 계기로 특정한 닭이 특정한 단백질을 만들 수 있게 되면서 그 이후부터 달걀이 탄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닭과 달걀 중 어느 것이 먼저냐 하는 과학적 논쟁에서 ‘학부모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 실마리란 한쪽이 먼저 변하는 것이 선행되어야만 다른 쪽의 변화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하나이고, 다음으로는 방향성이 존재하여 A에서 B로의 변화는 가능해도 B에서 A로의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하나이다. 그럼 누가 닭일까? 누가 먼저 변화해야만 할까?


나는 우리 시대의 ‘교육문제 해결’은 먼저 ‘학부모가 학교에 관심을 갖는 것, 자기 아이의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를 갖는 것’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즉, 학부모가 닭이다. 학부모가 먼저 변화해야만 학교와 교사들이 변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학부모 교육’에 있어서 큰 전환점을 맞이하려면, 그리고 ‘교육 문제’의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려면 먼저 학부모들의 의식이 변화하는 사건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학부모는 아이가 태어나서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여정에 부모가 기꺼이 참여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 과업 가운데 가장 가치 있고 중요한 일 중 하나라고 진심으로 믿으며 ‘부모의 시간’을 아이의 온전한 성장의 자양분으로 제공해야만 한다. 그러한 학부모가 교육의 동반자로서 함께 힌디면 ‘진정 아이를 위하는 사랑’이 교사와 학교를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를 변화시켜서 내 아이는 물론이고 전체로서의 인간 존재를 온전하게 성장시킬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있다. ‘학부모들의 의식’이 변화해야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만 한다고 해서 교사와 학교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마냥 기다리기만 해선 큰 전환점을 위한 바로 그 ‘변화’가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난감한 점이다. 변화된 학부모들과의 협업을 상상해 보고 미리미리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놓는 작업을 하는 것과 동시에 학부모의 의식 변화를 촉발시키기 위한 노력 역시 다름 아닌 학교와 교사의 과업일 수밖에 없다... 역시나 교육 문제는 심지어 학부모에 관련된 일조차 교육 전문가인 ‘교사’들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 이 부담스러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면 그리하여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부모교육’은 나에게 ‘부모들에게서 학부모로 변화하려는 의지를 이끌어내는 것’ 하나와 더불어 ‘그렇게 변화된 학부모와 하게 될 협업을 준비하는 것’ 이렇게 2가지 과제로 구체화되어 다가왔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어찌 마음이 무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2. 학부모 교육이 필요하다.

2가지 과제가 주어져서 마음이 무거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로는 ‘부모교육’을 통해 변화된 학부모가 교육의 동반자로서 학교 교육에 함께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 단계로 나아가 본다. 지금 학교에서 학부모가 학교교육에 참여하는 모습은 상담과 봉사활동, 행사 관람 이렇게 3가지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담은 ‘성적(점수와 석차) 확인’, ‘자녀와 관련된 문제 상황 파악하기’, ‘민원 제기하기’가 주된 내용이고, 봉사활동은 학생들의 교육활동을 지원하는 도우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며, 행사 관람은 운동회나 학예회 같은 행사에 관람객으로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모습의 부모들을 설명하는데 ‘교육의 동반자’라는 용어는 너무 과분하고 요즘 유행하는 ‘교육수요자’ 정도가 딱 적당할 것 같다. 목표로 삼고 있는 ‘교육의 동반자’라는 용어로 학부모를 설명하는데 아무런 위화감이 없으려면 ‘부모 교육’ 등을 통한 학부모들의 변화된 모습이 필요하다. 동반자라면 ‘주고받는 관계’여야 하는데 지금의 모습은 수요자가 ‘서비스’를 요구하면 학교와 교사는 최선을 다해서 수요자를 만족시키는 ‘일방적인 관계’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차마 ‘교육의 동반자’라고는 못할 것 같다. 그나저나 현재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알겠는데, 상상 속에 있는 ‘동반자로서의 학부모’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까? 1) 학부모를 만나 그들의 요구와 바람들을 귀 기울여 들어주고 그걸 최대치로 만족시키는 것을 통해 이른바 ‘교육소비자’들의 기분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게 하여 학부모들이 학교와 교사들을 긍정적으로 여기는 것이 ‘동반자로서의 학부모의 모습’일까? 2) 학교나 교사가 추구하는 교육철학과 교육과정의 공유를 통해 학부모가 학교와 교사의 교육 활동을 이해하고 공감하여 학생들이 가정에서도 학부모와 함께 교육활동을 일관성과 연속성 속에서 이어나가는 것이 ‘동반자로서의 학부모의 모습’일까? 3) 아이의 부모가 자신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학부모로서의 과업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게끔 도움을 주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노력에 에너지를 쏟을 수 있게 기운을 북돋아 부모와 자식이 그 결실을 함께 누리는 것이 ‘동반자로서의 학부모의 모습’일까? 4) 아니면 내가 한번이라도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아무런 상상조차 할 수 없기에 나에게는 너무 생소한 미지의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는 것이 ‘동반자로서의 학부모’일까? 신기하게도 ‘학부모 교육’이 무엇인지 그래서 ‘학부모 교육’을 위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상을 갖고 있지 못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나는 ‘학부모 교육’의 필요성만은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모든 교육은 자기 교육’이라고 했던가? 교사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한다는 것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는 과정이 아니라, 사실은 거꾸로 학생들을 통해 교사가 배우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인지학’의 가르침을 ‘학부모 교육’에도 적용시켜보면 ‘부모교육’도 학교와 교사가 학부모를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교사들이 학부모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그로 인해 교사 자신이 변해가는 것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부모 교육’을 통해서 내가 변화했어야만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꼭 필요했던 변화가 나에게 없었기 때문에 작년 한 해 동안 나는 소소하다면 소소하고 크다면 엄청 큰 다음과 같은 문제에 빠져들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아이의 내면이 바라는 것, 그렇게 변화하고 성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 담임 교사로서 내가 해줘야만 하는 일들이 갑자기 나의 과제가 되어 내 마음속에 찾아왔다. 다양한 방향으로 나의 과제를 구체화시켜 나가던 중 필연적으로 그 아이의 학부모에게도 내가 담임으로서 발견해낸 것, 내가 교사로서 하려는 것, 그리고 그 아이의 변화로 기대되는 미래의 모습 등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야만 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생각을 제대로 전할 길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아이의 문제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제가 아닌 것이 문제였다. 더 나은 방향으로 아이의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선 적절한 도움이 주어져야 했기에 문제라는 단어를 쓰더라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문제’라는 단어로 쉽게 언어화 하여 표현했을 때 마음속에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부정적 느낌’과는 그 아이의 상황이 묘하게 어긋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최대한 문제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문제를 설명해 내고 싶었다. ‘문제’라는 단어를 중립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는 학부모들의 자동반사가 언제나 ‘문제 상황’을 해결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경험칙’이 큰 소리로 경고음을 울리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다보니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식의 말을 학부모에게 전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지만 담임으로서 도움을 주고 싶은 부분이 있다는 것과 가정에서도 역시 가족들이 좀 더 관심을 가져주어야 한다는 것을 학부모의 불안감과 거부감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문제’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노력을 기울여 가며 이야기를 했다. 잘 진행되나 싶었던 대화는 마지막에 터져 나온 ‘학부모’의 한마디로 인해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상담이 거의 종료되어가던 시점에서 학부모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선생님 말씀은 우리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씀이신 건가요?” 학부모는 이후에 만약 자기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고 선생님이 생각하고 있다면 자신은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으며, 자기 아이가 얼마나 모범적으로 가정에서 생활하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아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해주고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라는 담임의 말을 듣고서야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문제가 없다’라고 결론 맺음으로서 학교에서 앞으로 담임이 아이에게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동의는 이끌어 낼 수 있었지만, 가정에서도 꼭 해야 할 일들에 대한 노력을 하는 것에 대한 약속을 받을 수는 없게 되었다. 이후에 학기가 종료될 때까지 나름대로는 아이에게 최선을 다했지만, 과연 정말 최선이었을까?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내 노력이 부족했던 건 아닐까? 만약에 ‘부모 교육’이 잘 되어 있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운 마음뿐이다. 담임이 ‘교육’이라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학생’ 존재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교육’을 위한 수업이 어떤 과정과 방법으로 이루어지는지, ‘교육’을 추구하는데 필요한 학교의 역할은 무엇이고 학부모의 역할은 무엇인지, ‘부모’는 아이를 어떤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지, 부모가 아이와의 겪고 있는 어려움은 무엇인지, 아이의 가정에서의 모습은 어떠한지 등등. 학부모와 교사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더라면 뭔가 다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위해 학교와 학부모, 교사와 학부모가 서로 협력하여 더 나은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거라는 안타까움에 마음이 불편했다.


불편할 것을 알면서 계속 같은 곳에 머무를 수는 없다.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야겠다. ‘부모 교육’을 위해서 바로 실행할 수 있고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만남’의 횟수, 시간 등 물리적으로 가까워지는 것부터이지 않을까 싶다. 물리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이 먼저이다. ‘거자일이소 내자일이친’이라는 사자성어로도 알게 되듯 심리적으로 가까워지고 정신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물리적 영역의 공유가 바탕이 될 때 가능할 것이다.


한 달에 한번 배운 것들을 선보이는 월례발표회, 주간이나 월간 소식지, 블로그나 밴드 혹은 클래스팅, 학부모와 교사의 저녁 모임, 선생님과 학부모의 합동 연수 등등. 몇몇은 이미 공교육 현장에서도 많은 선생님들이 하고 있는 것들이다. 물리적 영역의 공유를 위해서는 하나나 두개의 방법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다양한 방법들로 학부모에게 다가가야 할 것 같다. 과연 머리로만 상상하는 게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실천해 낼만한 의지가 나에게 있을지 새롭게 시작하는 올 한 해에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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