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지선생 [교육교육열매:초인계]

[TOB in 인지학]광주효동초등학교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앎 세번째 시간: 넷플릭스 영화 '비트를 느껴봐'에서 길어 올린 '교육의 비밀'을 통해 본 '스승과 제자의 역학관계'.

2020년 10월 6일 광주효동초등학교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앎 3회

광주효동초등학교에서 열린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앎 강독회(2020.10.06.)에서 ‘스승님’께서는 당신의 스승과 있었던 일화를 들려주셨다. 고민을 거듭하다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을 하게 된 제자인 자신에게 과도하다 싶을 만큼 날카롭게 반응한 스승 때문에 ‘나쁜 인상’을 그 순간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 한 발짝 떨어져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되돌아보니 이마저도 역시 스승을 통해 배우게 된 것이 있었다는 말씀을 하신다.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교사와 학생’ 혹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그 원리를 잘 보여주었던 영화 몇 개가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주제가 교육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영화는 아니었기에 낱개의 Scene에서 ‘교육의 비밀’을 길어 올려야 했지만 빠르게 스쳐지나갔던 영화 속 장면이 스승님의 말씀과 더불어 나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1. 교육의 출발점이 될 ‘경계선’

‘비트를 느껴봐(Feel the beat)’라는 넷플릭스 영화가 있다. 브로드웨이 오디션에서 ‘인성문제’로 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제당한 댄서 에이프릴이 사정상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동네 댄스교습소에서 어린아이들의 선생님을 맡아 댄스 대회에 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큰 줄거리이다.


주인공인 에이프릴은 ‘댄스 선생님’으로 아이들 앞에 섰을 때 가장 먼저 수업 중 반드시 지켜야 할 3가지 규칙부터 강조한다. 첫 번째 규칙은 집중하기. 이를 위해서 선생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 말소리를 내게 되면 ‘팔굽혀 펴기 20회’를 벌칙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그것을 끔찍한 농담쯤이라고 생각해 웃어넘기려고 했지만 에이프릴은 정색을 하면서 진심이라고 거듭 말한다. 두 번째 규칙은 최선을 다하기. 세 번째 규칙은 선생님이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만 하기. 이렇게 세 가지 규칙을 강조한 다음 단기간에 1등을 거머쥐기 위해 곧바로 쉬는 시간도 거의 없이 아이들을 다그치기 시작한다. 수업 중간에 말소리를 내는 아이에게는 유치원생이라도 가차 없이 ‘팔굽혀펴기 20회’를 시키고, 점프 동작을 하다가 넘어져서 얼굴에 있던 안경이 떨어진 아이에게는 ‘안경을 테이프로 얼굴에 붙여버릴까?’라는 막말을 하는가 하면,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에게는 ‘비트를 진동으로 느낄 수 있다면서 왜 자꾸만 뒤쳐지냐?’라며 모욕을 준다. 또, 어떤 아이에게는 ‘너는 제대로 하는데 하나도 없으니까 뒤로 빠져서 기초 동작부터 계속 반복 연습해’라면서 무시하는 말을 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되는 폭언과 학대 수준의 반복 훈련이 진행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 아이가 반항을 하게 된다. ‘무엇을 하라는지 모르겠는데 자꾸 소리만 질러 대니까 힘만 빠진다.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고 소리만 지르니까 괜히 우리만 바보가 된 기분이다.’라고 에이프릴에게 대든 것이다. 갈등의 폭발이다. 어찌어찌 갈등이 봉합되고 다시 수업을 하게 되었는데, 이후의 장면이 내가 영화에서 주목하게 된 scene이다. 아이들은 에이프릴과 다시 만나게 된 자리에게 불만을 털어 놓는다. ‘우리가 반항했다고는 하지만 수업을 겨우 한번밖에 안 해놓고 그만 둬버린 건 너무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우리는 아이라서 선생님처럼 빠르게 배우지 못하는데 너무 몰아붙여서 힘들다.’ 등등. 아이들이 반감을 갖게 된 이유를 다 듣고 나서 에이프릴은 ‘너희들이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내가 시키는 것을 그대로 하겠다고 한다면 나도 어제처럼 중간에 그만둔다고 하는 일 없이 대회 때까지 계속 너희와 함께 하겠다’라는 약속을 한다. 아이들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에이프릴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고 훈련은 다시 시작된다.


에이프릴의 수업은 막말로 자극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바닥에 테이프로 발자국을 표시하는 등 좀 더 쉽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변화가 생겼지만, 혹독한 반복 훈련과 소리 지르기, 집중하지 못하면 ‘팔굽혀펴기 20회’ 벌칙 수행하기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심지어 개그요소이긴 했지만, 참관하고 있던 학부모가 수업 중 말소리를 내자 그 학부모에게도 ‘팔굽혀펴기 20회’ 벌칙을 시키기도 하였다.



응???????? 뭔가 이상하다. 뭐가??? 우리나라의 교실로 이 영화의 상황을 가져와 보면 명확하게 무엇이 이상한지 알 수 있다. 우리들의 학교에 저런 방식과 태도로 학생을 지도하는 교사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동학대나 학교폭력으로 신고 당하는 최악의 상황은 배제하고 민원 등에 의해 대화나 상담이 진행되는 상황만 상상해 보자. “선생님의 자질이 의심스럽다.” “선생님의 교육 철학이 틀려먹었다.” “선생님의 수업 방식이 잘못되었다.” “선생님이 수업 방식을 바꿔야 한다.” “인생 경험이 더 풍부한 학부모의 눈에는 선생님의 수업 방식이 참으로 한심해 보인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상처 준 일들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앞으로는 학부모의 요구에 맞게 수업을 해라.” 등등 영화에서 펼쳐졌던 갈등 상황에서 아이들이 말했던 것과 우리나라 학교에서의 갈등 상황을 상상해 본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느껴지는가? 정답은 ‘경계선’이다. 에이프릴의 학부모와 학생들은 ‘경계선’을 명확히 지키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 학부모와 학생들은 ‘경계선’을 전혀 지키지 않고 있다. 애초에 ‘구분선’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그 경계가 허물어져 있는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학부모와 아이들은 ‘스승의 교육관’, ‘스승의 교육 방식’, ‘스승의 교육적 판단’ 등에 대해서는 가치 평가를 하지 않는다. 불만이라며 이야기하는 것은 스승의 수업으로 인해 자신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반복 훈련으로 인해 (나의) 몸이 힘들다.’, ‘어떻게 하라는 건지 (내가) 잘 이해를 못하겠다.’, ‘선생님이 중간에 그만 둘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하다.’ 등등 선생님의 영역, 즉 교육철학, 교육목표, 교육방법, 평가와 피드백 방법은 철저히 스승의 과업으로 남겨두고 자신에 대한 정보만 전하고 있다. 학생의 현재 상태에 대한 정보를 듣고, 수업을 어떤 방향으로 다듬어 나갈지는 온전히 교사의 몫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우리나라 학부모와 아이들은 자신의 영역과 선생님의 영역을 구분하지 않고 말을 한다. 그러다 ‘스승의 교육관’, ‘스승의 교육 방식’, ‘스승의 교육적 판단’ 등에 대해 가치 평가를 내리고 문제점을 발견했다며 으스대기까지 한다. 평가에는 반드시 ‘기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기준이라는 것은 대부분 물질주의에 근거한다. ‘물질주의’는 그 자체로 나쁜 건 아니지만, 다른 가치 기준들에 대해 늘 비교 우위에 서려고 하면서 편향적 사고를 유발한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물질주의’는 다른 사회 영역들에서도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중이니 교육의 영역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가치 평가’와 비판을 통해 도덕적 우위에 서게 된 학부모와 아이들은 우월감 속에 자신이 교육받길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얻게 되면 만족할 것인지 학교와 교사에게 요구하며 울타리를 넘어 교사의 땅을 헤집어 놓는다. 별거 아닌 듯 보이는 ‘경계선’이라는 차이. 이것이야말로 교육이라는 사태를 기동케 하는 최초의 ‘동력’이다.


2. 교사와 학생의 역학관계

가르침과 배움은 관계형성으로부터 출발한다. 기꺼이 스승이고자 마음을 먹는 사람, 자기 삶을 통해 학생의 배움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사람, 학생 존재 안에 심어져 있는 ‘가능성의 씨앗’이 자기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곁에서 도움을 주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스승’이 된다. 이와 동시에 반대편에는 무엇을 배우게 될지 알지 못하지만 스승이 가르치려고 하는 것을 기꺼이 배워보겠다는 마음을 품은 자가 ‘제자’가 된다. 두 사람 즉,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는 시작한다. 선생님이려고 하는 자와 학생이고자 하는 자의 만남으로 교육의 장이 열리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교육이 ‘시작’되는 필요조건이라는 것이지 이것만으로 ‘충분’할 수는 없다. 교육의 시작이 곧바로 교육의 ‘성공’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교사의 충실한 삶의 발자취, 학문적 소양, 능숙한 수업 기술, 훈련된 학생 관찰 능력, 소명의식 등을 비롯해서 교사가 교육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충분한 급여, 교육의지를 자극할 수 있는 사회적 명예도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학생의 안정적인 가정환경, 건강한 신체 발달, 균형 잡힌 영양 공급, 학부모의 적극적 지지 등 학생과 관련해서도 수많은 요소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교육’을 일단 시작해야 나머지 것들에 의미가 생기지 않겠는가? 애초에 교육의 장에 아무도 참여하지 않고 있는데 교사의 학문적 깊이, 현란한 수업 기술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학생의 평화로운 가정환경, 튼튼한 몸과 마음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예전에는 교육을 시작하는 ‘출발점(가르침과 배움의 관계)’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었다면, 요즘에는 그것들이 많이 무너져 내린 듯 보인다. 다윈주의(적자생존, 약육강식)와 물질주의가 극에 달해 이기심이 도를 넘어섰다. 내가 배우고 싶은 것만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효율적으로) 배우겠다는 선언이 ‘교육수요자’라는 단어로 언어화 될 만큼 사회에 널리 퍼지면서 교육의 장에는 ‘학생’이 사라져 버렸다. ‘학생’이 없는 곳에서 ‘교사’만으로는 교육이 시작되지 않는다. 교육의 장이 살아나지 않으면 결국 ‘교사’의 설 자리도 사라진다. 지금 이 땅에 ‘교육의 장’은 살아있는가?


아니 어쩌면 사실 효율성, 경제적 합리성만을 추구하는 우리 사회의 정신에 의해 ‘기꺼이 가르치는 일에 뛰어들고자 하는 교사’가 먼저 사라졌으며 이에 따라 ‘학생’들은 그저 그 흐름에 휩쓸려 버린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 교사들은 감히 ‘학생의 부재’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변명하지 말고 입을 다물어야만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교육이 시작되는 비밀’을 사람들이 다시금 마음속에 새기길 희망한다. 그래서 교육의 장이 활짝 열릴 수 있도록, ‘스승과 제자의 관계맺음’으로 교육이 시작될 수 있도록.


3. 제자가 된다는 것

지인들 중에서 배움의 길을 걸어가는 분들이 몇 분 계신다. 신기하게도 그 분들의 모습은 서로 닮아 있다. 일단 이미 본인들도 누군가의 스승이 될 만큼의 내공이 쌓여 있음에도 여전히 당신의 스승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 공통점이고, 그 분들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마치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 듯 보인다는 두 번째 공통점이 있다. 당신이 스스로의 삶으로 보여주려고(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그것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과 그것을 간절히 전하고자 노력한다는 것이 느껴지기에 저는 기꺼이 당신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출처 : '원펀맨' 리메이크 애니 중

그리고 최근에는 추가로 또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자신이 스승으로 모시는 분이 ‘연구자’의 길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도록 ‘경제적 후원’을 한다는 사실이다. ‘기꺼이 당신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다.’라는 선언을 가장 ‘진실’되면서도 ‘강력’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른바 ‘후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최근에서야 하게 되었다. 학창시절이야 학교라는 공간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유지시켜주지만, 학교라는 공간이 없는 곳(졸업 후)에서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현 시대에는 역시나 ‘후원’이 정답이겠구나 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필요한 것만 당신에게서 쏙쏙 빼내 가려고 합니다.’가 아니라 ‘기꺼이 당신의 제자가 되겠습니다.’라는 것을 물질이 가장 중요한 시대이니만큼 물질로서 멋지게 증명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물질로밖에 증명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물질로‘까지도’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시대에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과거나 미래에도 ‘후원’이 늘 정답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지금 시대에는 딱 들어맞는 것 같다.

출처 : '원펀맨' 리메이크 중

나는 ‘진심’으로 모시는 스승이 있는가? 스승의 길을 아무 조건 없이 후원할 만큼의 헌신이 있는가?

간접적, 비정기적 후원은 있지만 스스로에게 자신 있게 말할 정도의 헌신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 같다. 나도 어서 빨리 내가 스승이라고 모시는 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어야겠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나도 누군가의 스승이 될 자격을 갖추는 중요한 준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언제나처럼 이렇게 ‘스승님’으로부터 또 배운다.

조회 5회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