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지선생 [교육교육열매:초인계]

[TOB in 인지학]광주효동초등학교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앎 첫번째 시간: 인간의 삶에 담겨 있는 의미와 무늬만 대중교육이 아닌 진정한 대중교육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2020년 9월 22일 광주효동초등학교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앎 강독회


인간의 삶에 담겨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최근 내 안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질문’이다. 삶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에 대한 고민에 자주 빠져든다. 인생의 극 후반기, 즉 삶을 마무리하는 노년의 시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여쭈어보는 것으로 어서 빨리 답을 얻고 싶은 조급함까지 생겼다. 지금 아무런 감도 잡을 수 없는 상태이지만 왠지 황혼의 시기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뭔가가 보였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라는 식의 질문이 이어지다 갑자기 나를 이 세상에서 한번 지워보는 상상을 한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세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내가 사라졌다는 사실, 존재 했었다는 사실조차도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될 거라는 결론에 쉽게 도달했다. 내가 없어도 된다는 생각은 점차 확장되어 지구상에서 인간 전체가 사라지는 수준까지 도달했다가 더욱 확장되어 지구 전체, 마지막에는 우주 전체를 향한다. 역시 결론은 같다.


특별한 일이 과연 일어날까?

그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없이 시간은 언제나처럼 그냥 흘러가지 않을까?


그러다 생각은 문득 반대쪽을 살핀다. ‘내가 없어진다면’이 아니라 ‘내가 있음’으로 인해서 세상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걸 금세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있음’으로 인해서 지구가 변한다. 왜 더 빨리 이쪽으로 건너오지 못하고, 반대쪽에서 허무함만을 느끼며 힘겨워하기만 했을까?


나라는 존재가 없어진다고 해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있음으로 인해서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된다는 게 특별한 것이라는 생각이 가득해진다. 인간의 삶은 ‘있음’과 ‘변화 가능성’ 그 사이 어디쯤에 ‘의미’라는 걸 숨겨두지 않았을까? 인간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지금 이 순간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자연스럽게 ‘어떤 변화의 가능성이 나로 인해 열매를 맺어야 하는가?’ 로 이어진다. 또는 ‘세상에 의해서 요청되어진 과제를 위해 나는 내 의지를 어떻게 발휘해야 할까?’로도 말을 바뀌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의 삶에 담겨 있는 의미는 그렇게 ‘변화 가능성의 실현’으로 말미암아 찾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감사하게도 좋은 분의 배려로 광주효동초등학교에서 꽤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발도르프 공부 모임’에 이번 차시부터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앎’이라는 책을 읽어가고 있다고 하여 더욱 기대감에 부풀었다. 책은 혼자서도 읽을 수는 있지만, 모름지기 공부란 스승의 밑에서 가르침을 구할 때야 비로소 배움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이니까 말이다. 마침 강독회 진도가 평소 내가 고민하고 있던 주제와 공명하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 더욱 몰입해서 참여할 수 있었다.

인지학의 가장 멋진 점 중 하나는 바로 ‘시간’의 개념을 잘게 쪼갠 뒤 그것을 영원히 붙잡아 두려고 하는 이기심과 소유욕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질을 넘어 시간마저도 꽉 움켜쥐려는 현시대의 욕심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좁아지게 하고 세상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옹졸하게 하며 세상을 향한 행동은 위협적이 된다. 하지만 시간을 과거와 미래로 확장하여 나를 그 연속선 위에 위치시키게 되면 뭔가 달라지는 것 같다. 시간의 단위를 넓혀보는 것을 통해 ‘나와 내가 아닌 것들과의 연결’이 일어나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 세계가 확장된다는 것은 그렇게 사고와 감정과 의지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인지학은 우주적 수준에서의 시간 개념에 관한 이야기부터 들려준다. 시간을 확장시킨다는 상상력조차 인간의 한계에 묶여 고작 몇 백년 내지 몇 천년 수준의 확장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단어 그대로 우주적 스케일로 시간축을 좌우로 무한히 확장 시킨다. 압도적 스케일에 의해 이미 나의 사고로는 도달하지 못할 것 같은 거대한 규모의 이야기가 펼쳐지며 인간과 삶에 대한 역사적으로 연결된 인식을 보여준다.


세상에 대한 역사적 인식은 이른바 ‘시대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과제’를 지니고 교육적으로 유의미한 것들을 비로소 추구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교묘히 강요되거나 특정한 이익집단만을 위한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것으로서의 ‘교육’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확장되어 연결된 인류 전체를 위한 바로 그 ‘교육’으로서의 과제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의 교육에 대한 이야기


현재 나는 공교육에 발을 담구고 있다. 공적인 교육, 즉 공공의 목적을 위해 교육 당사자인 바로 그 대중을 위한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나는 정말 공교육을 하고 있을까?

오늘 강의에서는

“교육 대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인간을 어떻게 길러내려고 하는가?’라는 지향점이 중요한 것이다. 대중·인민을 모아놓고 귀족교육을 하면 그건 대중교육이 될 수 없다. 인민교육을 지향해서 차별 없이 아이들을 모아서 교육해야 비로소 ‘대중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라는 말씀을 들려주셨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공교육을 하고 있었던가? 라는 뼈아픈 반성을 해 본다. 대중을 특정 이익 집단에게 정신적으로 종속시키는 패배감을 심어주고, 스스로 자신이 하류를 지향하게 하는 교육을 아이들에게 강요했던 것은 아닐까?




상류문화 혹은 고급문화란 상류층이 향유하는 문화가 아니라 정확히는 상류층 자신은 자기가 특정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는 인식자체를 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어떤 삶의 방식을 말한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상류문화와 대중문화, 저급문화라는 식의 구분자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다 힘의 비대칭, 자원배분의 불균형 등의 여러 계기를 통해 대중이 특정한 집단의 삶의 방식을 동경하게 만드는 처음의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그 때서야 비로소 상류문화가 탄생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동경’이다. 동경 받는 문화를 자신의 삶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저 살아갈 뿐이기에 별다른 노력이 필요 없는데 비해서 자신의 삶을 동경하는 문화에 맞추려고 하는 사람은 항상 의식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조정해가는 노력을 쏟게 된다. 그리고 이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골이 깊어져서 나중에는 극복할 수 없는 격차가 되어 버린다. 드디어 상류층과 하층민이 구분되고 고급의 이미지가 피어난다고 한다.


이 때 이 차이를 평화적으로 항구히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교육’일 수도 있다는데 비극이 있다. 현재 이 순간을 포함해서 지금까지도 세계의 상당히 많은 학교에서는 ‘중산층의 백인 남성’ 문화를 바탕으로 가르쳐 오고 있다. 3단 논법이 이성적인 것이라는 믿음부터 시작해서 이른바 ‘양복’이 격식 있는 옷이라는 사소한 것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서 특정한 문화를 ‘동경’하게 만들고 있다.





예를 들어 아침식사를 부모와 함께 여유 있게 먹고 학교에 와서 공부를 한 뒤 저녁에는 다시 부모님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가정의 풍경은 과연 정말로 ‘표준’인 걸까? 또한 부모가 아침 일찍 일을 하러 나가버려서 아침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학교에 왔다가 집에 가서는 인스턴트 음식으로 저녁을 때우고 자정이 다 될 때까지 게임이나 스마트폰을 하며 늦게 들어오는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가정은 ‘비정상’인 것이 정말로 맞긴 한 걸까?


만약 소위 정상이라고 불리는 ‘표준’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집단이 극히 소수이고, 소위 ‘비정상’이라고 불리는 ‘기형’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집단이 대다수라면 학교가 하는 교육으로 아이들은 자신이 하층민이라는 패배감을 세뇌당하는 동시에 ‘누릴 수 없는 특정 집단의 문화’를 동경하게 되는 것을 통해 불평등, 불합리, 부정의에 저항할 생각조차 못하게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말이 나온 김에 좀 더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보자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펼쳐지는 특권층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정책에 사회의 극빈층들이 열렬히 찬성하고 나서는 동시에 하층민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정책에 대해서는 극렬하게 저항하는 아이러니는 바로 이러한 ‘학교’에서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탄생하게 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과연 우리가, 아니 내가 하고 있는 교육은 정말로 특정 집단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의 이익을 추구하는 교육이 맞는 걸까?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는 교육인 걸까?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교육적 과제를 추구하고 있을까? 교사로서 나는 ‘인지학’의 정신에 어울리게 살고 있을까?


이러한 생각들이 ‘광주효동초등학교’에서 열리고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앎 강독회’에 참여하게 되어 내게 찾아온 정신이다. 이러한 정신을 내가 만날 수 없었다면 어찌할 뻔 했나 아찔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인보앎 강독회’에 늦게나마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행운이다. 다음 주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요즘에는 기쁜 일 투성이다. 끝.


조회 9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