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지선생 [교육교육열매:초인계]

[TOB in 인지학(목)]공감과 반감 : 계속되는 실패의 경험-철학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그나저나 발도르프교육에 대하여 조롱, 폄하, 비난을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쩌나

10월 4 업데이트됨

인지학에 매료되어 발도르프학교의 교육을 내 교실에서 비슷하게라도 따라 해 보기 위해 꾸준히 뭔가를 꿈틀거리며 하다 보니 가끔(사실 많은 경우 교사들은 서로의 수업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도서로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다. 물론 나도), 정말 가끔 함께 공부해 보자는 제안을 받는 경우가 생긴다.

나는 지금까지 이런 제안을 2번 정도 받아보았는데, 두 번 밖에 안 되서 공통점이라고 하긴 좀 뭐하지만, 그래도 비슷한 점이 있었다. 공통점이란 그런 제안들이 발도르프교육에 대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만약 발도르프교육에만 집중된 연구를 하고자 하는 연구회가 있다면 ‘발도르프교육 전문가’에게 함께 공부하자고 부탁할 일이지 그저 ‘따라쟁이’일 뿐인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리는 없는 게 당연하니까 말이다.

반면, 여러 방면의 수업 방법을 두루두루 경험해 보면서 내 교실에 적용할 만한 ‘아이템’을 찾는 학습공동체는 연구주제가 하나로 명확한 연구모임과는 돌아가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역사적으로 검증된 수업기법부터 최신 유행하는 수업모형들에 이르기까지를 쭉 경험해 나간다고 했을 때 1~2년만 지나버려도 경험해 볼 수 있는 아이템이 한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수업기법이나 수업모형, 실천사례의 가짓수가 그렇게 적은 건 아니지만 엄청나게 많지도 않아서 그렇다. 그렇게 한계에 도달하게 되면 최종적으로 경험했던 다양한 수업기법들 중 가장 마음이 끌렸던 방법 한, 두 개를 선택해 깊이 있는 연구를 하는 모임이 되거나 아니면 연구회가 종료되어 버린다.

나에게 함께 공부해 보자고 제안을 했던 모임들의 성격은 다양한 사례 탐구를 하는 쪽이었다. 다양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로 ‘발도르프수업’도 끼워 넣은 것이라 연구회의 성격상 탐구의 깊이가 다소 부족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에게도 발도르프교육에 대해서 경험했던 것을 나눠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임에서 원하는 바는 분명했다. 수업 사례를 간단히 소개하고, 그 수업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기법을 다른 교실에서도 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유목화해서 제시해 주는 것이다. 패키징을 세련되게 해서 전달한다면 베스트다. 그래서 그런 모임에서 바로 내가 해야 했었던 발도르프교육 이야기는 유용한 수업기법 몇 개를 경험담과 함께 재미있게 전달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속해 있는 교사 집단에는 매우 독특한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교사가 아닌 사람들이 강사로서 교사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난 뒤에 똑같이 말하고 있는 부분이니 아마 교사만의 독특한 문화이지 않을까 싶다. 꽤 특이하다고 말해지는 공통점이란 강의가 끝나고 질의 응답시간에 반드시 나온다는 하나의 질문이다. 강사들은 교사들의 경우 지역과 연령에 관계없이 ‘어떤 질문’을 한다면서 매번 비슷하게 반복되는 상황 때문에 당혹스럽다는 후기를 들려준다. 교사만의 독특한 문화라고 생각되는 그 질문이란 바로

“그래서 실제 수업에는 어떤 방법으로 적용하면 될까요?”

“선생님이 사례로 보여주신 PPT 자료 좀 저한테 보내 주실 수 있으세요?”

이다.

심지어 어떤 교수님은 위와 같은 질문들에 내재되어 있는 ‘메뉴얼 지상주의’, ‘나는 지식의 소비자일 뿐이니까 누군가 생산해 놓은 지식을 그저 소비만 할 뿐이다’라는 위치선정으로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강의에서까지

“정말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면 ‘메뉴얼 지상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떤 메뉴얼에 따르면 될까요?”

라는 질문(물론 워딩은 달랐음)을 하는 걸 듣고 할 말을 잊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어쨌든 나도 초등교사이기 때문에 이런 문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라고 뭐 특별하겠는가? 모임에 참석해서 발도르프교육에 대하여 가볍게 소개 해 주길 바란다는 제안에는 응당 ‘메뉴얼과 자료집 제공’으로 대응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마음 한편에 ‘메뉴얼 지상주의’에 묶여 있지 않은 보다 창조적인 나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누군가 ‘좋은 수업의 도구라며 권하는 수업자료꾸러미’에 빠지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최대 규모의 교사 커뮤니티 사이트인 ‘ㅇㅇ스쿨’를 향한 발걸음을 줄여나가기 시작했던 것도 벌써 4년이 다 되어간다.

더불어 내가 ‘발도르프교육’에 매료 되었던 것은 ‘특정 수업 기술이나 방법’ 혹은 ‘예술적인 수업을 할 수 있는 메뉴얼과 자료’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는 인지학이 주는 최고의 선물은 바로 ‘가능성’이라는 단어이다. ‘설명’가능성, ‘관찰’가능성, ‘사고’가능성, ‘상상’가능성, ‘예측’가능성, ‘변화’가능성 등등. 발도르프교육이 내게 준 가장 멋진 혜택은 바로 가능성이라는 이름의 자유로움이었다.

지금까지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아동의 무엇을 관찰해야 하는지, 아동을 어떻게 관찰해야 하는지, 목표를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 무엇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지 등을 알지 못했다. 수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솔직히 교과서에 있으니까 가르치는 것뿐인데도 의사소통능력이나 문제해결능력 같은 추상적이고도 피상적인 목표달성을 위해 수업을 한다고 거짓말을 했었고, 학부모상담을 할 때면 솔직히 단원평가 점수와 소소한 사건사고들밖에 알고 있는 것이 없는데도 도덕성이나 인성 같이 쉽게 꾸며낼 수 있는 말들로 학생에 대해 잘 아는 척 연기를 해왔다.

가장 심각한 것은 성취기준이나 교과서에 제시된 교과내용이 지금과 같은 위계와 순서로 구성되어 있는 원리, 근거 등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되어 있지도 않으면서 ‘교육과정 재구성’이라는 시대의 유행에 따라 그저 교과와 단원 순서만 뒤죽박죽 섞은 다음 그럴싸한 상투어로 포장하기에만 바빴다는 사실이다. 허나 거짓말로 다른 사람들을 속여 넘길 수는 있어도 그런 거짓말을 하는 내 자신은 속일 수가 없는 법. 어느 순간 나는 그 위선들에서 혐오스러움을 강하게 느꼈다.

그런데 교육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것부터 설명하려는 발도르프교육의 인지학으로 인해 처음으로 ‘가능성’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마침내 가능성의 씨앗은 내 안에 심어졌다. 비로써 나는 눈이 생겨서 앞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손이 생겨서 만질 수 있게 되었으며, 다리가 생겨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제 막 열린 새로운 세계에 잘 적응했다는 것은 아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처럼 눈이 있으나 흐릿하고, 손과 발이 있으나 아직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확실히 내가 달라졌음을 확실히 느낀다. 발 밑에 발 디딜 수 있는 무언가 있음이 느껴진다.

1. 첫번째 실패


1년 전 한 전문적학습공동체의 초대를 받았다. 내가 했던 ‘발도르프수업 실천사례’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나는 그 제안에 ‘수업 메뉴얼과 자료꾸러미의 제시’라는 정답 대신 내가 발도르프로부터 받았던 선물을 준비했다. 내가 설명을 멋지게 하기만 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물이 전달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발도르프 선물꾸러미를 풀어놓기 전에 한 가지만 약속하자고 제안했다. 앞으로 3구성체(신체, 영혼, 정신)에 바탕을 둔 인간관을 토대로 논의를 전개해 나갈 것인데 일단 3구성체에 대한 거부감이나 궁금증, 질문들은 잠시 괄호로 묶어두고 이야기에 끝까지 귀 기울여 주라고 말이다. 출발이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한 발짝 내딛기만 한다면 사후적으로 엄청난 선물이 어느새 내 손에 들어와 있는 걸 눈치 채게 될 거라고 하자 모두 알겠다고 했고 그렇게 모임은 시작되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6시간 정도로 상당히 여유로웠기 때문에 2시간 정도 인지학에서 말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교육의 과제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고 나서 나머지 시간에는 내가 어떤 수업들을 했는지, 단순소개가 아닌, 실제 수업의 과정을 참석했던 선생님들과 함께 그대로 밟아나가면서 처음에 이야기했던 인지학과 연결시켜려 노력했다. 전문적학습공동체의 선생님들은 기대했던 내용과 내가 준비한 내용이 전혀 달라서 처음에는 다소 당혹스러워하시긴 했으나 그래도 함께 하는 순간만큼은 다들 열심히 해 주셨다.

2주 후. 발도르프수업 실천사례 공부에 관한 후기를 전해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문적학습공동체의 선생님들에게 전해지길 바랐던 ‘선물’은 전해지지 못했다. 3구성체에 대한 거부감을 일단 괄호로 묶어두고 끝까지 귀 기울여 줄 것을 약속하고 시작하긴 했지만 도저히 괄호로 묶어둘 수가 없었다고 하셨다. 인간이 물질적으로 관찰 가능한 신체뿐만이 아니라 영혼과 정신이 함께 하는 존재라는 것을 듣는 순간 약속과는 달리 이미 마음속에서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벽을 세웠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셨다. 무신론자로서 영혼과 정신에 관한 이야기는 자신의 취향이 아닐 뿐더러 유물론적으로 확인 불가능한 것은 신비주의니까 거북하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수업 실천사례를 받아들이는데도 문제가 발생하였다. 아침 열기 활동에서 하는 오늘 날짜와 날씨에 대해 말하는 활동, 시를 낭송하는 활동, 노래하는 활동, 리듬 있는 움직임을 활용한 활동 등이 ‘본 수업 전 동기유발 같은 활동’에 그 정도로 시간을 많이 허비해야 하는지 의문이 생기는 부차적인 활동으로 여겨진 것이다. 또한 그 이후의 수업과정도 마찬가지다. 분명 교과수업 사례를 소개했는데 선생님들은 교과수업이 아닌 창체 수업에 적합한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교과에 적용하기에는 너무 번거로운 방법이라면서 반감을 보였다.

그렇게 나는 실패했다. 나로 인해 세상이 뭔가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지 못하고, 부정적 에너지만 생산해 내고 말았다. 내 수준에서 인지학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비록 작은 날개 짓일지라도 미약하나마 미래에 활력을 불러일으켰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 때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은 이제 마음속에 하나의 표상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발도르프교육’과 ‘인지학’ 또는 ‘교육 예술’을 접했을 때 그 표상이 떠오를 것이다.

‘나 발도르프교육에 대해서 공부해봤는데 그거 신비주의라서 별로야.’

‘발도르프교육 살짝 공부해봤는데 노래를 많이 부르고, 율동도 해야 해서 내 취향은 아니야.’

물론 더 좋은 기회, 더 좋은 선생님을 만나 ‘아 그 때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이구나.’라고 다시 생각하게 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로 인해 반감을 가졌다는 것에 상당한 죄책감이 들었다. 실패가 ‘죄’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느껴본 순간이었다.

2. 두 번째 실패

3주 전의 일이다. 몇 년 전부터 어느 학교에나 한 개쯤은 운영하고 있는 학교단위연구회의 담당 선생님께서 ‘발도르프교육에 대해 소개하는 책’을 추천해 줄 것을 부탁하셨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첫 번째 실패가 생각나기도 하거니와 이 연구회의 성격 때문에 그랬다. 학교단위연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자발성의 결여’이다. 명칭은 전문적학습공동체인데, 전문성의 핵심 구성요소 중 하나인 ‘자발성’, ‘자율성’이 없는 연구회라는 건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실적을 위해 존재하는 학교단위연구회라고 해서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교육에 관한 일은 똑같이 하고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니까 하다못해 고민을 털어놓는 자리가 되기도 하고, 배움이 원래 그렇듯 뜻밖의 배움이 찾아오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심각한 결함이 내재되어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발성의 결여’로 인해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바로 학교단위연구회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학습공동체를 통해 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열심히 참여해서 정해진 것을 열심히 하긴 하지만 딱 거기까지. 해야 할 것을 정할 때가 오면 하고 싶은 것이 없으니 아무도 무엇을 했으면 좋겠는지 떠올리지 못한다.

그런 학교단위연구회에서 ‘발도르프교육에 관하여 알 수 있는 책’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발도르프교육에 관한 어떤 관심에서가 아니라 조금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다음모임시간을 때우기 위한 목적에서의 그런 부탁이라는 이야기이다. 나는 솔직하게 책 추천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발도르프교육에 대한 최소한의 호감이라도 있지 않으면 아무런 감흥이 없을 거라고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하지만 결국 다음모임에서 특별히 이야기 나눌 것이 없는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이 ‘가볍게’ 살펴만 보기로 하고 ‘발도르프 관련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결정되었다.

어떤 책을 추천할지 고민했다. ‘인간을 위한 보편적인 앎’이나 ‘발도르프교육에 관한 방법적 고찰’은 너무너무 무겁다. 그렇다고 ‘노래하는 나무’나 ‘내 아이가 사랑한 학교’, ‘슈타이너 학교의 참교육 이야기’같은 학부모 수기는 추천하고 싶지 않았다. 그밖에 ‘선생님은 살아있는 교육과정이다.’와 같이 수업방법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는 책은 발도르프교육을 너무 방법론적으로만 인식할 것 같아서 제외. 결국 고민을 이어가다가 나는 첫 번째 실패 때와 같은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무려 1년 전과 같은 방식으로 사고해서 같은 목적을 위해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 것이다.

내가 선택한 책은 ‘교사를 위한 인간학’이었다. 번역본이 아니라 어찌됐든 한국 사람이 자기가 이해한 것을 한국말로 쓴 인지학 책이라 것이 주요한 선택의 이유였다. 그리고 이왕이면 가볍게 살펴보더라도 수업기술이나 수업자료가 아니라 발도르프교육이 어떤 식으로 인간과 교육을 이해하고 있는지 소개하고 싶었다. 나는 또다시 내가 받은 선물을 남들에게도 똑같이 주려는 마음이 생겨버렸다. 정말 가볍게 학부모 수기를 읽고 느낌만 나누거나 아니면 쉽게 적용할 수 있게 수업방법을 잘 설명해 놓은 책을 읽고 약간의 부연설명정도만 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서 편한 일이었는데, 나는 이번에도 그러지 않았다.

한편 우연이라고 해야 할까? 9월초 무등자유발도르프학교의 열번째 인지학 공부 모임에서 지금까지 부분부분 끊어서 살펴보았던 ‘인간의 발달단계’를 총 정리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인간의 구성요소와 각 요소들이 하는 일을 살펴보고 나이에 따라 발달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어떤 교육적 과제가 주어지는지 전체적인 관점으로 정리해 보았다. 그동안 분절적으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인간 발달에 대한 구슬들이 하나로 꿰어지는 순간이었다. ‘교사를 위한 인간학’을 읽고 학교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일이 다가오기 바로 직전에 인간발달에 대한 이해가 한층 정교해지는 경험이 찾아오다니 이 정도면 운명인지도 모른다.

연구회 선생님 중 한분이 ‘교사를 위한 인간학’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로 가득 하다면서 책을 추천했던 내가 어느 정도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이야기 해 줘야만 한다고 미리 부탁을 했었는데, 인지학 공부 모임을 통해 때마침 인간 발달에 대한 전체적인 관점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운명이 아니라면 참 신기한 우연이다.

나는 상당히 동기가 충만한 상태에서 ‘교사를 위한 인간학’을 통해 발도르프교육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며 모임에 참석하였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에도 나는 실패를 했다. 두 번째 실패다. 발도르프교육과 인지학이 줄 수 있는 선물은커녕 오히려 발도르프교육에 대한 반감만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우선 기본적인 상황자체가 너무 좋지 않았다. ‘교사를 위한 인간학’을 읽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정확히 60분으로 제한이 걸려 있었다. 타이트한 제한시간은 ‘자발성이 결여된 연구회’의 숙명이다. 몇 줄 안 되는 동시를 읽고 소감만 나누더라도 빠듯할 수 있는 시간 내에 무려 ‘인간학’이라는 주제와 그에 따르는 교육적 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온전히 다루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충격적이었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나마 그 1시간도 제대로 사용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연구회 선생님들은 ‘교사를 위한 인간학’의 앞부분에 나오는 ‘영혼과 정신에 관한 이야기’를 보자마자 책을 덮어버리거나 아니면 그냥 글자만을 억지로 읽어내는 수준의 독서 후에 모임에 참석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러다보니 한명의 선생님이 ‘책 요약해서 전달하기’라는 과제를 미리 부여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제한된 시간 60분의 앞부분은 책을 읽어 오지 않았거나 도통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독서를 포기한 선생님들을 위한 내용요약정리 시간이 차지했다. 그리고 내용요약정리 시간은 무려 40분에 육박했다. 책의 내용과 인지학과 발도르프교육에 관한 이야기는 고사하고 하다못해 소감을 나눌 수 있는 시간도 10분 남짓밖에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대부분의 시간이 할애된 ‘내용요약정리’의 시간이 뭔가 의미가 있었느냐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인지학에 대하여 뭔가 이야기 나눌 시간이 없었다는 충격에 더해서 ‘내용요약정리’의 시간은 또다른 충격과 공포의 시간이었다. ‘교사를 위한 인간학’의 내용을 요약해서 전달하는 과제를 부여받은 선생님은 인지학이나 발도르프교육에 대한 사전경험이 있는 분이 아니었다. 그 선생님은 책의 내용을 요약정리하기 위해 먼저 발도르교육과 루돌프 슈타이너에 대한 배경지식을 블로그에 요약된 글을 수집해서 얻었다. 누구의 블로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 요약된 정보로 규정되어 버린 루돌프 슈타이너는 신지학의 아류, 괴테의 아류, 동양철학의 아류, 사상의학의 아류였다. 어떤 사상가의 철학을 살펴봄에 있어 영향을 준 스승들을 살펴보는 것은 그 철학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분명 도움을 주는 일이다. 하지만 단지 아류로 취급할 뿐인 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문제다.

인간을 이해함에 있어서 눈에 보이는 신체뿐 아니라 영혼과 정신의 존재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신지학에서 가져온 것이고, 인간을 4가지 기질로 나누고 그 변화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상의학을 베껴온 것이며, 시간의 개념을 확장해서 윤회와 업을 말하는 것은 동양철학을 따라한 것이라는 식의 짜깁기로 하나의 사상을 누더기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철학을 이해하는데 티끌만큼의 도움은커녕 심각한 오해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마냥 좋게 해석해서 신지학과 사상의학, 동양철학의 세계관을 통해 ‘인지학’을 간접적으로 엿보고자 한 것이냐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절대절대 아니다. 가져온 것은 오직 ‘이미지와 편견’이다. 신지학에서는 신비주의, 종교적 추종이라는 편견을 끌어오고 사상의학을 통해 비과학성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웠으며 동양철학이 풍기는 허세와 과장이라는 분위기를 이용했을 뿐이다.

40분 동안의 ‘내용요약정리’를 통해 남은 것은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지학’과 발도르프 교육이 무언가의 아류라는 감각이었다. 선생님들은 자신이 의지가 부족해서, 또는 책의 내용을 이해할 만한 사전 경험이 없어서 책을 읽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책이 내재적으로 읽을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던 거라는 ‘심리적 위안’을 얻게 되었으며, 그런 상태에서 설상가상 시간은 ‘10분’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나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이대로 인지학과 발도르프교육이 희화화되고 조롱받은 채 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용요약정리’의 과제를 부여받고 참석한 선생님뿐만이 아니라 나도 ‘발도르프교육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소개하기’라는 과제를 미리 부여받고 모임에 왔기 때문에 말할 내용은 이미 잘 정리되어 있었다. 문제는 제한된 시간 1시간 중 40분의 시간은 이미 날아갔고, 10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시간이 없었기에 준비해 왔던 내용 중 대부분을 잘라내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내용이 가장 중요할까?

갑자기 ‘첫 번째 실패’가 떠올랐다. 그 때의 전문적학습공동체 선생님들은 인지학의 첫 문장 때문에 반감이 생겼다고 했다. 영혼이라는 단어에서 곧바로 과학과는 정반대편에 있는 무언가의 기억이 떠올랐고, 이어서 정신이라는 단어에서 종교적 분위기를 느끼게 되어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는 말이다. 과거를 거울삼아 예전과는 다르게 뒷부분이 아니라 앞부분을 공략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발언기회를 요청했다. 그리고 2가지만 이야기한다고 강조하고 10분간의 사투를 시작하였다. 조롱과 비난, 폄훼의 분위기와의 싸움을 말이다.

먼저 뜬금없지만 ‘양자역학과 과학자들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로 운을 띄웠다.

“양자세계에서는 지금까지의 과학적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전자 하나를 이중슬릿 중 한 곳으로 통과시키는 실험에서 간섭무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빛의 이중슬릿 통과 실험과 아인슈타인 광전효과로 인해 빛의 이중성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전자의 이중슬릿 실험은 손쉽게 전자도 입자이면서 파동이라고 결론짓고 넘어가기에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우선 과학자들이 이중슬릿의 한쪽 구멍으로 한 개의 알갱이를 쏘았다는 사실입니다. 간섭무늬가 나왔다는 이야기는 전자가 파동의 성질을 보이며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지나간 것이 되는데, 과학자들은 분명 알갱이 하나를 한쪽 구멍으로만 쏘았으니 이상한 일이죠. 그리고 더욱 이상한 것은 결과적으로 이중성을 지닌 알갱이 하나가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지나간 것이므로 실제로 그 모습을 관측하기 위해서 측정 장치를 이중슬릿에 설치하고 전자를 쏘면 이전까지와는 달리 파동의 성질이 아닌 의심할 나위없는 입자의 모습으로 두 개의 줄무늬만 생긴다는 겁니다.

자, 여기서 우선 말해야 하는 것은 제가 당연히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저에게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제가 양자역학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양자역학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장면 속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의 태도가 말하고 싶기 때문에 양자역학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장면에서 과학자들은 분명히 실재하는 현상이 눈앞에 있고, 그 현상이 기존의 이론으로 설명 불가능할 때 ‘왜’라는 물음을 잠시 뒤로 미뤄두고 관측된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 상태에서 현상을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과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들을 찾아 나서는 태도를 보인다고 합니다. ‘왜’는 중요한 물음이지만,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사후적으로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왜를 통해 출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현상을 설명해 내기 위해 뉴턴역학의 사고방식으로는 비과학적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많은 이론들을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왜’로 출발하지 않았지만 그와 같은 활동을 통해 만들어진 양자역학의 이론은 이제 ‘자연현상이 왜 저런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명확한 설명을 해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화학에서의 공유결합 같은 현상이 ‘왜’ 발생하는가를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자연현상을 인간이 의도를 가지고 더 정교하게 다룰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과학자들의 태도’는 과학 팟캐스트 ‘과학하고 앉아있네’를 듣고 있던 중 알게 된 사실입니다.

하지만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은 조금 다른 선택을 한다고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마주하게 되면 곧바로 ‘왜 그럴까?’라는 질문부터 하게 되고, 이유를 먼저 찾아 나선다는 겁니다.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구체적으로 알지도 못하고 설명할 수도 없으니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는 모르는게 당연합니다.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더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데만 매몰되고 현상을 이해하는 일은 요원해집니다.

정리해 보자면 ‘과학자들이 태도’란 현상을 있는 그대로 설명해 보려고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눈앞에 실재하는 현상을 설명이 안 되다고 해서 그걸 무시해버리거나 이미 알고 있는 비슷한 현상으로 대치시켜서 손쉽게 해석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겁니다. 설명이 안 되면 새로운 이론을 구축한 뒤 인식한 현상을 제대로 마주합니다. 이게 바로 과학자들이 과학을 하는 태도이고, 그렇게 과학은 발전해 나간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의 태도’가 과학을 발전시킨 중요한 원동력이라고 마지막으로 다시 강조한 다음에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로 교육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과학자들의 태도’를 가지고 연구 활동을 해야만 한다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의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우리 교육에서도 이와 같은 과학자들의 태도가 교육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 적용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가장 유행하고 있는 교육의 목표는 ‘행복’입니다. ‘행복’이라는 교육의 목표는 앞서 말씀드린 이야기에 비춰보면 과학자들의 태도와는 정반대의 태도에 의해 도출된 결론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한 삶을 목표로 하는 현시점의 모든 혁신교육이 어떤 질문으로부터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아마 ‘왜 수업하지?’라는 질문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주장하는 사람들의 출발점은 ‘왜?’입니다. 앞선 이야기에서 ‘왜?’라는 질문부터 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대상을 마주할 때 성급히 상황을 모면하려는 태도라고 했습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삶의 과정은 어떠한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탐구와 이해 없이 그저 ‘왜?’라는 질문만을 쫒으니 행복이라는 단어만을 깊이 없이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는 게 저의 진단입니다. 실제로 혁신교육현장은 어떻게 교육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깊이가 없고, 늘 제자리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교육을 ‘과학자들의 태도’로 연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까요? 우선 ‘왜?’를 묻는 행위는 잠시 접어두고 눈앞에 관찰 가능한 현상에서부터 설명, 기술(Description)해 나가야 합니다. 교육은 대상이 있는 활동입니다. 인간, 더 정확히는 아동을 대상으로 합니다. 인간을 대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교육일까요? 직업훈련이나 (수능같은) 특정자격을 갖추게 하는 것이 교육의 진정한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바일 것입니다. 간단하게 먼저 말해서 인간을 잘 길러내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고 하면 쉽게 동의하겠지요. 그러면 여기서 ‘잘’은 어떤 의미인가요? 그냥 ‘잘’일 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그 다음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설명해야만 ‘잘'의 의미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을 가만히 떠올려보면 몸이 있다는 걸 바로 설명해 낼 수 있습니다.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 점점 커져서 어른이 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어서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조금 있으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실재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인식하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인간의 의지라고 할까요? 평소 동기유발을 한다고 말할 때 바로 그 동기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합니다. 또한 지금 마음속에 느껴지는 수많은 감정들, 무언가를 쉽게 이해하거나 잘 이해하지 못하는 능력,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흥미와 누구의 지루함이라는 태도, 마지막으로 머릿속에서 폭발하고 있는 생각들과 과거의 일에 대한 기억들 등등. 인간이라는 존재에 의해 엄연한 현실로서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현상들을 우리는 과학적인 태도로 설명해 내야만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으로 무시하거나 ‘뇌의 전기신호와 호르몬의 분비’일 뿐이라면서 저차원적으로만 설명해내려고 해서는 도무지 ‘인간’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기술이 곧 처방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 생각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느낌은 어디에서 시작되어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나의 의지는 언제 커지고, 언제 작아지는지, 그것이 최대한 커질 때가 언제이고 얼마만큼 지속가능한지, 내 신체의 가용범위는 어떻게 되는지, 내가 깨달음에 도달할 때 나는 어떤 여정을 거치게 되는지 등을 우리는 정교하게 설명해 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을 알게 되니까요.

우리 앞에는 ‘교사를 위한 인간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영혼, 정신 등과 같은 용어에 너무 편견을 가지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전 세계에 5명 정도이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양자역학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계산하는 것이라고 하니까요. 그래서 양자역학에는 ‘닥치고 계산’이라는 우스겟소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럼 그저 계산만 하는 것이니 양자역학이 무가치한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최신 현대문명은 모두 ‘양자역학’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계산해 낼 뿐인 양자역학이 역사상 가장 정확하고, 최고로 유용한 ‘리얼리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발도르프의 인간학도 용어에 현혹되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거나 비과학적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들의 태도로 인간을 제대로 설명해 내고 있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합니다. 그리고 편견과 예단을 거두기만 하면 인지학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그려내는 인간과 교육에 관한 ‘리얼리티’를 경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10분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꽤나 절박한 마음으로 위와 같은 말을 선생님들에게 쏟아냈다. 과연 선생님들에게 나의 진심이 전해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남아있었던 10분을 모두 사용해서 이야기했기에 이제 약속된 1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자발성이 결여된 모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절대가치는 제한시간을 지키는 것이니 이제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모두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시간에 파묻히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번쩍! 손 하나가 올라왔다.

원래는 시간이 다 되어서 그냥 넘어 갈라고 했는데, 내가 호소했던 말 중에 ‘과학’이라는 단어가 너무 거슬려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하시면서 어떤 선생님께서 소감을 이야기하셨다. 그 선생님은 ‘교사를 위한 인간학’이라는 책이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하셨다. 최근 반론이 제기되기는 했지만 한번 결론이 났었던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와의 관계’를 근거로 제시하시면서 ‘네안데르탈인이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켜서 몰아냈다’는 것이 과학적인 사실인데, ‘교사를 위한 인간학’을 보면 현생인류를 네안데르탈인의 진화로 말하고 있으니 ‘과학’을 말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신다. 또한 ‘교사를 위한 인간학’에서는 인간을 가장 고차원적인 존재로 설명하고 있는데,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것은 구시대적 사고방식일 뿐 인간은 동·식물과 다르지 않은 존재라고 하시면서 역시 ‘과학’을 말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신다. 이렇게 2가지만 보더라도 비과학적이고 어쩌면 ‘거짓된 내용’으로 채워진 책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덧붙이셨다. 발도르프교육이 태어난 독일에서 발도르프교육이 하나의 대안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발도르프교육 실천가들의 실천에 대한 가치평가이지 ‘인지학’ 자체는 아니라고 하신다. 심지어 독일에서조차 ‘인지학’은 배척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서 ‘인지학’이 가치있다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라는 것까지 말씀하시고 소감을 마치셨다.

솔직한 소감을 마지막에 말씀해 준 선생님 덕분에 나는 애매한 기분이 아닌 ‘깔끔한 기분’으로 모임을 끝마치게 되었다. ‘역시나 실패였구나.’라는 기분. 비록 좋은 마음은 아니었지만 헛된 희망을 품고 있는 것보다 확실하게 두 번째 실패를 인정할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다음을 상상해 본다. 세 번째 실패를 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이다. 발도르프교육과 인지학에 대한 비난, 폄하, 조롱을 어떻게 하면 인정, 관심, 공감으로 돌릴 수 있을까? 의지를 갖고 계속 생각해 봐야겠다.

마지막으로 너무, 진짜로 너무 궁금한 것들이 샘솟는다. 선생님들의 관심은 소위 ‘실천’이라고 일컬어지는 수업방법, 수업기술, 수업자료일 뿐 그것을 작동시키는 ‘교육철학’이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도 쉽게 실천과 그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을 깔끔하게 분리해 낼 수 있는지 미스터리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건가? 애초에 정신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아예 정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분리해 낸다는 인식조차 없을 테니 말이다.

또한 교육을 말하면서 인간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궁금증이 생기는 일이다. 비슷하게 인간을 대상으로 일하는 ‘의사’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언제나 우선한다. 신체의 내·외부 구조, 면역체계, 순환구조를 비롯하여 개별적으로는 환자의 혈액형, 알레르기 반응, 생활습관 등등 진단과 치료 전에 인간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를 우선시한다. 그런데 누구보다 인간을 대상으로 일하는 선생님은 과연 인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지금까지는 교육의 모든 목적이 외부에 있었으니 굳이 인간에 대해서 알아갈 필요가 없었다. 목표에만 도달하면 되었으니까. 입시에 나를 맞추고, 자격시험에 나를 맞추고, 입사시험에 나를 맞추는 등 그렇게 최종목표인 ‘돈’과 ‘명예’의 획득만 할 수 있으면 됐다. 하지만 그러한 왜곡된 교육관은 유효기간이 끝나가고 있다. 제대로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외부의 목표가 아닌 교육 그 자체에서 목표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역시 인간을 제대로 설명해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인간을 말하지 않는 교육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놓여있을까?

나에게는 어떤 과제가 주어졌을까?

늘 관심을 기울여서 답을 찾아봐야겠다. 끝.